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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역사 찾기 프로젝트 - 제5편 인도
 관리자    | 2007·09·10 09:53
13일 밤, 싱가포르 창기 국제공항에서 캘커타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 방문지는 인도 캘커타이다. 과거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 당시 수도였고, 인도 동부 최대의 도시이자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고도인 캘커타는 현지어로는 '콜카타(Kolkata)'라 불리고 있었다. 국제공항이라는 명칭조차 어색할듯한 콜카타 공항에 도착한 직후 받은 느낌은 '아마도 앞으로 내 평생 이곳보다 낡은 공항을 방문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결제 택시를 타고도 웃돈을 얹어주며 시내 중심 에스플러네이드(Esplanade)에 위치한 호텔로 가는 1시간 동안의 여정은 그야말로 카레이싱을 방불케 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음에도 양편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족히 100년은 되고도 남아 보였으며 도로의 나이 역시 결코 그보다 적을 것 같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서로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거리의 자동차와 사람들이었다. 신호등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터에 수시로 보행자들은 차도로 뛰어들었고, 자동차들은 이를 보고도 경적을 울리며 보행자의 정지나 속보를 재촉할 뿐 속도를 줄인다든가 하는 행위들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서울이었다면 1일 평균 1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인도 국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당초 인도에서 콜카타를 방문지로 정한 것은 바로 이 국립 도서관 때문이었다. 전 인도축구연맹(AIFF)은 수도 뉴델리에 있지만 이 협회의 모태가 된 인도축구협회(IFA: 현재는 벵골주 축구협회에 해당)는 이 도시에 있다. 따라서 필자는 1차적으로 도서관에서 조사 작업을 벌인 뒤 미진할 경우 벵골주 축구협회를 방문키로 했다. 이런 선택을 한 데에는 한국 대표팀이 인도에서 치른 7경기 모두 콜카타에서 벌어졌다는 이유도 있었다.

참고로 밝혀두면, 콜카타가 영국의 식민 지배 시절 인도의 수도였던 탓에 축구를 비롯해 크리킷, 하키 등 스포츠들도 이곳을 통해 처음 유입되었다고 한다. 특히 축구에 관한 한 콜카타가 속해 있는 벵골 지방이 인도의 중심지로써, 인도 최대의 경기장인 솔트레이크 스타디움(12만 명 규모)도 이곳에 있고, 인도 최대의 명문 클럽들인 모훈 바간과 이스트 벵골, 모하메단 등도 이 도시를 홈으로 하고 있다.

약 15분간의 주행 동안 목격한 콜카타의 교통 사정은 방콕이나 콸라룸푸르의 살인적인 교통체증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선도 그어져 있지 않은 도로에는 상황에 따라 차들이 세줄, 네줄로 알아서 늘어섰으며 경적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한국의 도로 사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결코 이곳에서 적응키 힘들 것이다. 콜카타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이 200여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도서관 건물은 한눈에 최소 150년은 된 식민지 시대 건물임을 직감케 했다. 영어가 인도의 공용어라고는 하지만 계층별로 구사의 정도가 다른데다 인도 특유의 발음과 억양 때문에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있었는데, 도서관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과의 대화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물어물어 찾아간 신문 열람소는 60대 이상의 노인 서너 명이 관리하고 있었다.

인도에 오기에 앞서, 필자는 RSSSF의 이스라엘인 멤버인 야니브 블레이셔라는 친구에게서 인도에 가면 '힌두스탄 타임즈'라는 신문을 검색해볼 것을 권유받은 바 있다. 힌두스탄 타임즈는 인도 유력지로, 영문으로 발간되는 신문이다. 야니브의 말로는 자신이 과거 힌두스탄 타임즈가 경기 상보를 자세하게 보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필자가 중점적으로 찾아야 할 부분은 1982년 3월 네루컵과 1984년 10월 아시안컵 지역예선이었다. 사서에게 1982년 3월과 1984년 10월분 힌두스탄 타임즈를 요청했는데, 영어가 익숙지 않은지 여러 사람을 거치더니 그중 한 명이 "여기에는 1989년 이후 분만 보관하고 있으니 주지사 공관에 있는 'Newspaper Reading Room'에 가보라."라고 알려줬다. 실망감이 컸지만 다시 도서관을 나와 한참을 걸은 끝에 택시를 잡아타고 사서가 써준 주소를 내보였다. 도착한 곳은 필자가 묵고 있는 호텔 바로 앞이었다. 마침 점심때가 된데다 주지사 공관의 위치를 확실히 알 필요가 있을듯하여 호텔로 돌아왔다.

점심을 마치고 어렵사리 연결된 인터넷을 통해(여담이지만, 최소한 콜카타에서 필자는 인도가 떠오르는 IT 강국임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화 약 1만 원을 주고 24시간 동안 신청한 인터넷 연결의 최대 속도는 5MB 정도였으며, 그나마도 자주 끊기는 바람에 웹서핑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알아낸 콜카타 한인회로 전화를 걸었고, 오후 3시경 가이드 한 명을 호텔로 보내주겠다는 응답을 얻었다.

지난밤의 경험으로 미뤄 짐작할만한 콜카타의 교통 체증으로 인해 예정보다 약간 늦게 도착한 가이드는 바로 콜카타 한인회의 문대헌 회장님이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문 회장님은 인도 정착 10년째이며, 이곳 콜카타가 인구 1천만을 넘는 대도시이긴 하지만 수도 뉴델리나 IT와 엔터테인먼트 산업 메카인 하이데라바드, 뭄바이보다는 크게 낙후된 곳이라고 설명해줬다.

어쨌든 주지사 공관 주소를 갖고 길을 찾기 시작했는데, 에스플러네이드 로터리에는 대낮임에도 족히 수만 명은 될듯한 인파들이 좁은 골목을 메우는 바람에 사람 숲을 뚫고 전진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필자 역시 인구 1천만이 넘는 대도시인 서울에서 출생하여 지금껏 살아왔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는 처음이었다. 높은 습도가 더해져 불쾌지수는 극에 달했고, 인도에 대한 실망감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하고 보니 도보로 5분이면 갈 수 있을 거리 같았지만, 주지사 공관을 찾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역시나 낡디 낡은 주지사 공관으로 들어가자 왼쪽 쪽에 신문 열람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면에서 보면 마치 교회 같기도 한 건물의 발을 걷고 들어가자 눈에 들어온 풍경은 역사책이나 영화를 통해 봤던 중세 수도원 도서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국가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마이크로 필름은 고사하고 1800년대에 발행된 신문들부터 최근 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본 형태로 보관하고 있었고, 검색은 아예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양손은 검은색으로 물들어갔으며 마치 필자가 과거로 돌아가 활동하는 듯한 착각을 하게 했다.

이곳에서의 첫 번째 난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열람 규정이었다. 이곳 역시 50대는 족히 넘어 보이는 노장 서너 명이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열람 신청서를 쓰면서 들은 첫 마디는 "하루에 1인당 3권(1권=1개월분)까지만 열람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순간 필자는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신문이 비밀문서도 아니고 열람 제한이 웬 말인가? 더구나 인도에 도착해서야 감지한 사실이지만 다음날인 8월 15일은 인도의 독립기념일로, 도서관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가 문을 닫는다고 했기 때문에 필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곳에 도착한 3시 30분경부터 폐관 시간인 6시까지, 단 2시간 30분에 불과했다.

일단 필자는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할 1982년 2,3월과 1984년 10월분을 신청해서 검색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잘못 넘겨도 이곳저곳이 찢어질 정도로 종지의 질이나 보관 상태가 열악했지만, 천만다행으로 힌두스탄 타임즈는 한국 대표팀이 치렀던 경기를 대부분 충실히 보도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1984년 10월 19일, 인도와 치른 마지막 경기에 대한 정보가 빠져 있었다.

필자는 동행한 문회장님을 통해 캘커타 지역에서 발행되는 영자 신문 'The Stateman'이 그중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984년 10월분 이 신문을 다시 청구했다. 다행히도 스테이트맨은 힌두스탄 타임즈에 누락되었던 이 경기에 대한 보도가 있었고, 필자는 1차적으로 인도에서 계획했던 7경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말레이시아에서 누락되어 있었던 1960년대 인도와의 메르데카컵 세 경기에 대한 정보였다. 앞선 7경기에 대한 검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아직도 폐관까지는 1시간 30분 이상이 남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용객들도 거의 없는 터여서 필자와 문회장님은 사서에게 다가가 통사정을 시작했다. 사람도 없으니 한 권만 더 보게 해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사서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늘어놓더니 이내 위층으로 올라가 하나 둘씩 신문 뭉치를 꺼내오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인도에서는 당시 기자를 파견하지 않았는지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두 권을 보고 난 뒤, 다시 사서들에게 다가가 사정을 했다. '이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다.'라는 필자의 간청에 사서들은 다시금 열람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5시 30분경 모든 작업을 마치고 주지사 공관을 나섰다. 문회장님의 설명이 이채롭다. "인도에는 규정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다고들 합니다." 단 하루의 경험이었지만 필자는 이 말을 100% 공감할 수 있었다.

다음날 다시 한번 보강 조사를 하고 싶었지만 1년에 단 3일 도서관이 쉰다는 국경일 중 하나인 독립 기념일이라 필자는 아쉬움을 남긴 채 인도를 떠나야 했다.

15일 밤으로 예정되었던 출국 비행기를 앞두고 필자는 솔트레이크 스타디움 인근에 위치한 문회장님의 자택에 잠시 머물렀다. 광복절을 맞아 한인회 행사를 주관하고 오신 문회장님의 안내로 필자는 솔트레이크 스타디움에 조성된 스포츠 컴플렉스를 둘러봤다.

솔트레이크 스타디움은 본부석을 제외하곤 의자가 설치되어 있지 않지만, 추산 수용 인원이 12 만에 달하는 인도 최대이자 서아시아 최대의 경기장이다. 문회장님의 설명으로는 이 경기장이 위치한 지역 자체도 행정구역상 캘커타의 위성도시인 솔트레이크시라고 했다. 이 경기장은 1984년에 개장하여 당시 한국 대표팀이 10월에 벌어진 아시안컵 지역예선전 4경기를 치렀다. 지난해에는 AFC U 20 선수권대회를 개최해 역시 한국팀이 6경기 모두를 소화했던 곳이기도 하다.

경비가 그다지(?) 삼엄하지 않아 경기장 내부도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지난해 대회 당시 지적되었던 잔디 문제나 관중석의 안전성 문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경기장은 3단 구조로 되어 있으며 당초 육상장으로 지어졌지만 이제는 트랙 부분이 거의 지워져 있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진입로는 약 30여 개였는데, 그중 사용하지 않는 일부 출입구에는 잡초가 무성해, 한때 아시아 정상권이었음에도 최근 약체로 전락한 인도 축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경기장 주변에 펼쳐져 있는 여러 면의 보조 구장에서는 아마추어 선수들 간의 친선 경기도 펼쳐지고 있어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인근 대학의 학생들이라는 이들은 유니폼을 맞춰 입을 여유도 없는 듯 보였지만 열띤 응원전을 펼치며 패기 넘치는 대결을 펼쳐 지켜보는 필자까지 웃음 짓게 했다.
  
주지하듯, 인도는 1960년대 아시아 4강에 들만 한 전력을 갖췄던 강호로 군림했으며, 특히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결승에서 대회 최강으로 꼽혔던 한국을 2-1로 격파하고 금메달을 차지했고, 2년 뒤 아시안컵에서도 이스라엘에 이어 준우승한 바 있다.

밤이 되어 문회장님 일가에게 감사와 작별을 고한 후, 필자는 또다시 카레이싱을 방불케 하는 택시에 몸을 싣고 캘커타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싱가포르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자정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공항에 도착한 것은 10시경으로 약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다른 국가의 공항들과 다른 점은, 탑승 수속을 하기 전에 수화물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규모의 협소함 때문인지 취항하는 항공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비행기에 오른 후, 피곤을 느낀 필자는 곧바로 잠들었고, 중간에 승무원이 권하는 기내식도 마다한 채 계속 잠을 청했다. 눈을 뜬 것은 필자를 깨우기 위해 어깨를 흔드는 승무원에 의해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비행기 안에는 필자를 제외한 승객들이 모두 내린 상태였고, 다시 싱가포르 땅을 밟게 되었다.

[플라마 l 윤형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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