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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역사 찾기 프로젝트 -1편 홍콩 [플라마]
 관리자    | 2007·08·30 10:55
8월 18일 현재, 필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머물고 있다. 지난 1일 인천공항을 출발하면서 시작된 3주간의 '한국축구 역사찾기' 프로젝트가 이틀전, 마지막 방문국인 인도네시아에 다다랐지만, 공교롭게도 17일이 이곳의 독립기념일 연휴의 시작이어서 관공서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귀국 일정은 좀 늦어질 듯 하다.

인간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이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던 필자로서는 '기록'이 인간 역사의 핵심이라는 믿음에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인간이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후세로 전래하는 방법에는 필사에 의한 방법과 필사에 의하지 않은 방법의 두가지가 있다. 두 방법 모두 각자의 장단점을 갖고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축구에 있어서 역사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축구는 다양한 사회현상의 일종이며, 문화의 한 부분이다. '모든 역사는 정치사'라는 근대 이전의 믿음에서 벗어나 현대로 흘러올수록 정치가 아닌, 사회 다양한 분야의 흐름에 대한 연구가 한창인 것이 최근 역사학의 특징이다. 축구사 역시 그런 흐름에 편승해 주목되고 있는 사회 제 분야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사실상 현재까지 한국 축구 역사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간주할 때, 이번 원정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한국 축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번 원정의 주된 목적은, 1950년대 이후 동남아시아권에서 한국 대표팀이 펼쳤던 경기들 중 기록이 유실된 약 100여개 경기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록이란 주로 출장 선수 라인업과 득점 현황 등 매우 간단한 수준의 것이지만, 이런 류의 기록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찾아내기가 힘든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내심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었다. 또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전체적인 문화 수준이나 기록에 대한 관습 등을 감안할 때 한국에 비해 크게 낫다는 기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원정기를 게재하기에 앞서, '왜 이러한 축구 기록들을 찾아야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역사는 '기록'이 시작된 이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역사상 주요 문명을 주도했거나 현재까지도 주도적 위치에 있는 국가들은 대부분 '기록의 전통'을 갖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현 시점에서 과거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은 기록 외엔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근년 문제가 되었던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일본과의 역사 갈등 역시 우리가 확실히 내세울만한 역사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적어도 축구에서만큼은 이러한 시련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필자에겐 강했다.

물론, 축구는 통계의 스포츠가 아니라는 특성이 있지만, 통계와 기록은 다르고, 자국 축구사에 대한 기록의 양이 그 나라 축구 문화를 대변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 작업은 분명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필자는 믿으며, 그러했기에 지난 7년간 필자는 이 작업에서 손을 놓지 않았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기록들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얻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기가 TV로 중계되는 오늘날은 누구나 경기에 대한 기록을 얻을 수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 기록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금새 잊혀지게 되고, 그 시간이 쌓이다 보면 아예 그런 경기가 있었는지 조차 기억하기 힘들게 된다. 1948년 이후 한국 대표팀이 치른 경기의 목록 조차 확정되지 않은 현시점에서, 물경 60여년에 달하는 한국 대표팀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이런 이유로 결코 간단치 않은 것이고,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이 작업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필자와 이번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대한축구협회 기획실 송기룡 부장님의 인식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필자는 사실 처음엔 일신상의 사유를 들어 원정 제의를 고사했지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지 모른다는 송부장님의 설득에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약간의 부가적인 호기심이라면, 그간 필자의 추산에 의해 센츄리 클럽 가입 가능선상에 있었던 김호곤, 허정무, 박성화, 조영증, 최종덕 등 몇몇 선수들의 출장 횟수를 정확히 따져보고픈 마음도 있었다. 귀국 후 자세히 검토해봐야겠지만, 필자의 추측대로라면 현재까지 확보한 자료만으로도 이들중 일부는 최소 A매치 100경기 출장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원정 대상국은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 등 6개국이었으며 필자는 대한축구협회의 위임을 받아 각국 축구협회 및 국립도서관, 주요 언론사 등을 방문해 당시의 기록들을 채취해내는 것을 주요한 활동 내용으로 삼았다.

빠듯한 일정 탓에 방문국들의 다양한 모습을 돌아볼 시간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조사 과정에서 필자가 느낀 점들과 표면적으로나마 접한 해당국 축구의 모습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6개국 모두 필자로서는 처음 방문하는 곳이고, 문화나 기후가 한국과는 전혀 다르며 원정 기간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장장 3주간에 걸친 원정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분명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참고로 필자는 이번 원정을 '잃어버린 기록을 찾아서'라는 제하로 연재할 예정이다.

첫 방문국은 홍콩이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약 2시간여의 비행 끝에 중간 경유지인 타이뻬이에 도착, 한시간 정도의 대기를 거쳐 점심 무렵 홍콩에 도착했다. 국립도서관과의 접근성을 고려해 숙소를 홍콩섬 동쪽 외곽에 잡은 탓에 숙소를 찾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난생 처음 접해보는 동남아시아의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진땀을 빼야 했다. 필자가 머물렀던 노스 포인트 지역은 영어가 그다지 잘 통하질 않았고, 심지어 거리에서 만난 경찰관에게 길을 물어볼 때에도 그들은 영어에 익숙치 않은 듯 약도를 그려주며 대답을 대신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조사활동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당초 홍콩에서 찾아야 할 경기들은 약 20여개였다. 핵심은 한국의 최초 A매치로 추정되는 1948년 7월 6일, 홍콩과의 경기(5-1 승)였다. 이날 오전 카우 룬에 위치한 홍콩축구협회를 방문, 지난 3월말 대한축구협회에서 발송했던 협조 공문에 대한 응답을 얻을 수 있었다. 홍콩협회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비교적 용이하지 않은 듯한 폐쇄적 건물 구조였지만, 한 젊은 직원의 협조로 빠른 시간 안에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1948년 경기의 경우 득점자와 예비 엔트리만 구할 수 있었지만, 다른 경기들의 경우 국내에 남아있는 자료들의 신빙성을 분별할만한 수준의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홍콩축구협회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오후에는 빅토리아 공원 근처에 위치한 최신식 건물의 홍콩국립도서관을 찾았다. 영어가 공용어인 곳인 만큼, 몇 종류의 영자 신문들을 볼 수 있었고, 그중 비교적 역사가 긴 홍콩 스탠다드와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의 마이크로 필름을 신청해 검색에 들어갔다. 도서관에서 보유하고 있던 신문들 중 1948년판이 남아 있는 것은 단 한종으로, 7월 7일자 기사를 통해 당시 경기에 대한 상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이 경기에 출전했던 홍콩팀의 성격은 의문으로 남지만, 어쨌든 이날 경기를 A매치로 간주할 경우 한국 대표팀의 역사상 A매치 첫 득점자는 전반 3분 선제골을 터뜨린 故 정남식 옹이다. 역시 고인이 된 정국진 옹은 2분후 추가골을 터뜨려 두번째 득점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 신문에 따르면 한국팀은 이 경기에서 데리고 간 17명의 선수중 16명을 활용했다고 전해지며, 물론 당시엔 교체선수 제도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친선 경기의 경우 이러한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두 종의 유서 깊은 영자 신문들 외에도, 한자로 발행되는 현지 신문들도 대체로 경기에 대한 보도는 상세한 편이었다. 부가적으로 1956년 제 1회 아시안컵에서의 한국팀의 상세한 활약상을 알아낼 수 있었고, 故 최정민 옹이 이 대회의 득점왕임을 확인했다. 또한 도쿄 올림픽 예선전과 일정이 중복되어 디펜딩 챔피언임에도 2진급을 파견할 수 밖에 없었던 1964년 제 3회 이스라엘 아시안컵에 대한 정보도 의외로 홍콩 신문을 통해 얻게 되었다. 대체로 영국계 기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신문들의 스포츠면 기사는 그 내용이나 분량, 수준이 유럽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고, 주요 정보들을 압축적으로 요약해 놓아 검색하는 입장의 필자를 조금은 편하게 해줬다.

홍콩에서의 조사에서 의문시되었던 부분은, 한국과 상대했던 홍콩팀들의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는데, 당시 홍콩에는 자유중국(대만) 선수들이 상당수 뛰고 있었고 이들과 홍콩 선수들은 거의 분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아시안컵이나 월드컵 예선 같은 공식 대회가 아니면 홍콩팀에 대만 선수들이 수시로 합류하기도 했었다. 실제로 홍콩 영자 신문에서 표기한 홍콩팀의 명칭도 'Combined Chinese'나 'Hong Kong XI'같은 것들이 많아, 이들이 실제로 홍콩을 대표하는 A팀인지 여부는 좀 더 숙고를 해봐야할 것 같다.

이틀간 진행된 홍콩에서의 조사는 비교적 순조로웠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목표치의 90% 이상을 채우고 다음 방문국인 태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필자의 숙소가 위치했던 North Point 지역은 지도상으로 홍콩섬 최동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커우 룬 반도로 이동하는 배가 드나드는 선착장에서 가까웠다. 전체적으로 변두리 분위기가 강했으며 서울의 경동 시장이나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모습이나 억양은 중국이라기보다는 동남아에 가까운듯 보였으며 생활 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주목할만한 것은, 대부분의 건물들이 최소한 50년은 넘어 보임에도 20층은 족히 될듯한 고층에 일종의 주상복합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 1980년대 홍콩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던 풍경과 유사했다.


[플라마 l 윤형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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