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특별시축구협회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한일전 명예의전당
 관리자    | 2007·08·11 18:59
"우리의 선량하고 충실한 신민이여!"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한 항복녹음이 전국으로 방송된다. 원자폭탄의 위력에 놀라움을 나타내면서 포츠담선언에서 밝힌 연합군측의 무조건적인 항복 요구를 수락한다고 밝힌다. 이로써 민주사변 이래 14년 동안의 일제 침략전쟁은 종막을 내리게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수출품 김치가 일본 열도의 심장부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고, "오~겐끼 데쓰까~~?" 란 문장이 대중 매체 쇼 프로그램에서마저 하나의 유행어로 자리잡을 정도로 우리에게 이젠 일본이 가깝게 느껴진다.  아직도 '일본인'이란 말 한마디에 기겁을 하며 밤잠을 설치시는 우리의 할머니들이 살아 계시고 '사치꼬', '하루꼬', '아끼꼬…등의 일본식 이름에 고개가 돌아가는 우리의 어머니들과 함께 숨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를 개척, 유행시켜 나간다는 신세대들의 인식 속에 이미 '현해탄' 이 사라진지 오래다.  아무리 동족 간이라고는 하지만 그토록 파렴치하고 무시무시한 집단이라고 세뇌 받았던 '북괴 공산군'과도 따뜻한 포옹으로 맞이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면, 한-일 간의 활발한 문화 교류 또는 양국의 젊은이들 사이의 의식 구조 개선이란 개념 자체도 어쩌면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뉴욕의 한 리서치 기관에서 지구촌 각지의 10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조사 자료에 의하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가치관 중의 하나로 '공동체 (Community)를 꼽았다.  '나 (I)' 가 아닌 '우리 (we)' 라는 개념의 공동체 말이다.  유럽 공동체의 출범을 필두로 인터넷이란 치유 불가능한 '바이러스'가 우리 모두의 일상 속으로 침투해 오는 순간부터 어쩌면 서서히 우리 모두의 '나(I)' 는 사라져버리기 시작한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상은 서로의 이해 관계, 종교, 국적, 문화, 시차…와 관계 없이 '거대한 하나'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  '815 해방'이후 55년이란 세월이 이 모든 걸 가능케 했다.  하지만… 그토록 '전능'해 보이는 '시간'마저 우리를 실망시킨 사례 하나가 아직까지는 존재한다.  이미 55년 전에 끝난 것으로 믿고 있었던 한, 일 간의 전쟁이 오늘날까지도 매년 정기적으로 재연되고 있다.  '전쟁의 잔해'가 가장 먼저 사라져야 했을 스포츠 현장에서 말이다.
이 세상에 한-일 축구전 만큼 재미 있는 스포츠 경기는 없다.  후추 아니라 후추 할아버지라도 이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볼 때 마다 연출되는 박빙의 승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역전 드라마, 슈퍼맨을 능가하는 초인적 정신력… 지난 50여년 간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던 추억의 명승부 3개를 꼽아보라는 질문에 한-일전 축구 하나쯤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어지간한 골수 축구 팬이 아니더라도 3경기 모두를 한-일전 축구로 장식할 스포츠 팬들도 꽤나 있을 것이다.  축구 한-일전 공짜표 한 장만큼은 여자보다도 좋다고 고백할 아저씨들이 있다.  '재미' 차원에서 한-일전 축구는 '끝'이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한-일 축구전을 새 천년 첫번째 맞이하는 8월15일 광복절 날, 후추 사상 처음으로 '불명예의 전당' 이란 이름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스포츠가 주는, 특히 한-일 축구전이 주는 재미, 감동, 그리고 교훈… 이 모든 것들도 스포츠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하겠지만, 언제까지 우리는 이러한 감정적인 요소들만을 얼싸안으며'정신적 자위행위'를 고집할 것인지 냉정한 관점에서 한번쯤 짚어야 할 때가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타 경기에서 찜찜하기 짝이 없는 성적을 내고도 한-일전 한 경기만 이긴다면 그해 대표팀 '농사'는 풍작이 되어버리고 다른 경기 다 이겨도 일본에게 진다면 이완용과 '한 핏줄'이 되어버리는… 언제까지 우리는 일본 축구와 경쟁하고 비교하며 결국은 뒷걸음 칠 것인가?  이젠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왔다.  이젠 한-일전을 '전쟁' 아닌 일개 축구 경기로만 봐야 할 때가 왔다.  이젠 새로운 경쟁 상대와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때가 왔다.  

과연 한-일 축구전이 이렇게까지 감정적이고 '패배 = 죽음' 이란 등식을 성립시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아주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시각에서 보거나 또는 아주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한-일전의 '적대화'현상에 기여한 대한민국 언론의 공로는 피해갈 수가 없다.  그 어떤 각도로 파헤쳐 보더라도 그들의 '전쟁 분위기 조성'혐의는 피해갈 수가 없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광복'이란 없었다.  스포츠 신문 판매 부수 '전쟁'은 곧 한-일전이란 또 다른 '전쟁'을 낳게 되었고 1945년 한민족 모두가 느꼈던 해방은 오늘날까지도 완성되지 못했다.  그들의 판매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지난 10여년 동안, 한-일 축구전과 관련 된 스포츠 신문의 머릿기사를 들춰보면 참으로 민망해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프로 권투가 우리나라 스포츠 팬들의 최고 스포츠로 군림하던 20여년 전, 방송사의 권투 중계 예고 편에 등장했던 나레이터의 멘트를 듣고 참 유치하기 짝이 없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너를 위해 2년을 기다렸다…", "돌아온 저승사자 XXX…"  요즈음 한-일전을 두고 스포츠 신문에서 써대는 헤드라인에 비하면 그 시절엔 그래도 낭만과 순수함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넌 짜샤, 냄비 팬이야!" 하는 말에 꼭지 돌지 않을 축구 팬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참으로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바로 '냄비 팬'이란 말일 것이다.   냄비처럼 쉽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그런 순진하지만 간혹 어리석은 팬들을 대량 생산하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 스포츠 언론사이다.  스포츠에 대한 뚜렷한 주관이나 철학이 정립되지 않을 나이의 어린 팬들이 그나마 의지(?)하고 공부할 수 있는 창구의 기능을 악용해서 언론의 획일화 된 논조와 감정 섞인 기사에 길들여지게 만들어 버린다면 대다수의 팬들이 '냄비' 아닌'뚝배기'로 거듭날 수 있는 그 날이 언제쯤 올 것이란 말인가?  결과 지상 주의?? '일본한테는 죽어도 이겨야 한다' 이 말 보다 더 확실하고 자랑스럽게 우리 스포츠계의 병패를 공개하는 말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해마다 한차례씩 열리는 국가대표 팀 간의 축구 한-일전을 지켜보면서 아직도 "일본 놈들 아무리 날고 뛰어봤자 아직은 우리한테…" 하는 우월감에 빠져 있는 후추 독자가 혹시 있다면 금번 명예의 전당 기사는 이쯤에서 읽지 않는 게 좋을 듯 싶다.  우리가 지난 10여년동안 그토록 한-일전에 '목숨 걸고' 있을 때 일본은 이미 세계를 겨냥했고 그들의 경쟁상대는 더 이상 한국이 아니었다.  "그래도 대표팀끼리 붙으면 우리가 이기는데??" 하고 반문하는 독자가 있다면 가장 최근 한-일전 경기 테이프 구해서 실컷 즐기길 바라는 바이다.  한국 축구의 가장 큰 문제점, 이젠 지겨울 정도로 거듭 지적되어왔던 꿈나무 육성, 지도자 양성, 저변 확대, 인프라 구축..등,  그 어떤 분야에서도 우리는 이미 일본에 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대표팀끼리 붙으면 우리가 이기는데??"  그럼 그게 이기는 것인가 보다…

엉뚱한 일본은 이미 오래 전 한국 축구로부터 '해방'을 했고, 60-70년 대 아시아 축구의 주역이던 우리는 정작 아직까지도 일본 축구를 잣대 삼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무작정 한국 축구에 대한 비난이나 하려고 하고 말야… 니들이 한국 축구에 대해서 뭘 알아??!!" 하며 난색을 표명하는 팬들도 여럿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부터가 그 무엇보다도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지만 축구 한-일전의 승패는 이미 경기장 밖에서 판가름 났다.  '살살 달래가며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절해서 우리 축구의 개선책을 모색해야지…?' 이미 10년 전에 그랬어야 했다.  그리고 이젠 결실이 아니 결실 비슷한 그림이라도 나왔어야 한다.  일본 축구의 과감하고도 장기적인 투자와 급속도의 성장에 한번쯤 위기감을 느끼지 않은 팬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그눔에 한-일전 승리가 그 순간적인 위기감을 안도의 한숨으로 뒤바뀌어 놓고 우리 모두의 눈가에 가리개를 두르게 한다.  최근 들어 '이젠 정말 일본한테 개박살이 한번 나야지 우리 축구가 정신을 차릴 것이다.' 라는 불순한 (?) 생각을 가져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를 보고 '친일파 쪽바리 앞잡이'다 뭐다 해가며 온라인 상의 대화의 창구에서 철저히 매장되고 만다.  그런 말을 뱉은 사람은 결코 일본 축구를 더 사랑해서도 아니고 우리 축구가 X 되는 꼴을 학수고대해서도 아닐 것이다.  그 어떠한 크고 작은 자극도 결국은 단발적인 '땜방용' 개선방안에 불과했고 '한-일전 대패' 이상의 국민 정서적 충격 외에는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최후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 간의 진정한 실력 평가를 최우선 목표로 하는 경기라면 국가대표들만이 펼치는 1회성 '정신력 싸움'은 이제 그만두기로 하자.  두 나라 사이의 진정한 실력을 평가할 수 없는 경기를 왜 고집한단 말인가?  굳이 두 나라 간의 실력 차이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한날 한시에 유소년 대표에서부터 국가대표까지 모조리 다 한번 비교 평가 해 보고 아주 지겹도록 자주 해 보도록 하자.  그 동안 축구 한-일전이 우리 국민들에게 선사했던 수 많은 추억들은 소중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간직하도록 하되, 기성 세대들이 느껴왔던 한-일전 승리의 쾌감과 감정적 우월감은 우리 세대로 끝내야 한다.  지금 자라나고 있는 한국의 어린 축구 팬들까지 '한-일전만 이기면 된다. 우리가 일본보다 축구 더 잘한다.'는 말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일본을 매년 한차례씩 꺾음으로 해서 마치 한국 축구의 '내일'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후추 초유의 '불명예의 전당' 문을 연다.  우리 축구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감정이 난무하는 역사의 족쇄에서 벗어나 화합과 발전의 공동체를 중시하는 그들의 어린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한-일전을…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 축구전… 지난 반 세기동안 참으로 많은 감동과 추억거리를 주었던 명승부 중에 명승부였다.  역사적인 배경 때문이던 아님 그냥 미우라 삼바춤 추는 꼴이 죽어라고 싫어서 였던 간에 좌우지간 한-일 축구전 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아들레날린(adrenaline)을 들끓게 했던  스포츠 경기도 드물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한-일 축구전을 우리는 목격해왔고 환호해 왔는지 우선적으로 한번 살펴 보기로 한다.

<역대 국가 대표 한-일 축구전 결과>

1954년 / 도쿄(일본) / 스위스 월드컵 예선 1차전 / 5 : 1 승
1954년 / 도쿄(일본) / 스위스 월드컵 예선 2차전 / 2 : 2 무
1956년 / 도쿄(일본) / 멜버른 올림픽 예선 1차전 / 0 : 2 패
1956년 / 도쿄(일본) / 멜버른 올림픽 예선 2차전 / 2 : 0 승
1959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 3회 메르데카배 대회 / 0 : 0 무
1959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 3회 메르데카배 대회 / 3 : 1 승
1959년 / 도쿄(일본) / 로마 올림픽 예선 1차전 / 2 : 0 승
1959년 / 도쿄(일본) / 로마 올림픽 예선 2차전 / 0 : 1 패
1960년 / 서울 / 칠레 올림픽 예선 1차전 / 2 : 1 승
1961년 / 도쿄(일본) / 칠레 올림픽 예선 2차전 / 2 : 0 승
1962년 / 자카르타(인도네시아) / 제 4회 아시안 게임 대회 / 1 : 0 승
1963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 7회 메르데카배 대회 / 1 : 1 무
1964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 8회 메르데카배 대회 / 3 : 0 승
1966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 10회 메르데카배 대회 / 2 : 0 승
1967년 / 방콕(태국) / 제 4회 아시안컵 대회 / 2 : 1 승
1967년 / 도쿄(일본) / 멕시코 올림픽 예선 / 3 : 3 무
1968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12회 메르데카배 대회 / 2 : 0 승
1969년 / 서울 / 멕시코 월드컵 예선 1차전 / 2 : 2 무
1969년 / 서울 / 멕시코 월드컵 예선 2차전 / 2 : 0 승
1970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14회 메르데카배 대회 / 1 : 1 무
1970년 / 방콕(태국) / 제 6회 아시안 게임 대회 / 2 : 1 승
1971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15회 메르데카배 대회 / 3 : 0 승
1971년 / 서울 / 뮌헨 올림픽 예선 / 2 : 1 승
1972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16회 메르데카배 대회 / 3 : 0 승
1972년 / 도쿄(일본) / 제 1회 한일 정기전 / 2 : 2 무
1973년 / 서울 / 제 2회 한일 정기전 / 2 : 0 승
1974년 / 도쿄(일본) / 제 3회 한일 정기전 / 1 : 4 패
1975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19회 메르데카배 대회 / 3 : 1 승
1975년 / 서울 / 제 4회 한일 정기전 / 3 : 0 승
1976년 / 도쿄(일본) / 몬트리얼 올림픽 예선 / 2 : 0 승
1976년 / 서울 / 몬트리얼 올림픽 예선 / 2 : 2 무
1976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20회 메르데카배 대회 / 0 : 0 무
1976년 / 도쿄(일본) / 제 5회 한일 정기전 / 2 : 1 승
1977년 / 도쿄(일본) /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 0 : 0 무
1977년 / 서울 /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 1 : 0 승
1977년 / 서울 / 제 6회 한일 정기전 / 2 : 1 승
1978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제22회 메르데카배 대회 / 4 : 0 승
1978년 / 방콕(태국) / 제 8회 아시안 게임 대회 / 3 : 1 승
1979년 / 도쿄(일본) / 제 7회 한일 정기전 / 1 : 2 패
1979년 / 서울 / 제 8회 한일 정기전 / 4 : 1 승
1980년 /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 / 3 : 1 승
1981년 / 도쿄(일보) / 제 9회 한일 정기전 / 1 : 0 승
1981년 / 부산 / 제11회 박대통령배 대회 / 2 : 0 승
1982년 / 서울 / 제190회 한일 정기전 / 3 : 0 승
1982년 / 뉴델리(인디아) / 제 9회 아시안 게임 대회 / 1 : 2 패
1983년 / 도쿄(일본) / 제11회 한일 정기전 / 1 : 1 무
1984년 / 서울 / 제12회 한일 정기전 / 1 : 2 패
1985년 / 도쿄(일본) / 멕시코 월드컵예선 1차전 / 2 : 1 승
1985년 / 서울 / 멕시코 월드컵예선 2차전 / 1 : 0 승
1988년 / 도쿄(일본) / 제13회 한일 정기전 / 1 : 0 승
1988년 / 카타르 / 제 9회 아시안컵 대회 / 2 : 0 승
1989년 / 서울 / 제14회 한일 정기전 / 1 : 0 승
1990년 / 북경(중국) / 제 1회 다이너스티컵 / 2 : 0 승
1991년 / 나가사키 / 제15회 한일 정기전 / 1 : 0 승
1992년 / 북경(중국) / 제 2회 다이너스티컵 예선 / 0 : 0 무
1992년 / 북경(중국) / 제 2회 다이너스티컵 결승 / 2 : 2 (2 PK 4) 패
1993년 / 도하(카타르) / 미국 월드컵 예선 / 0 : 1 패
1994년 / 히로시마(일본) / 제12회 아시안 게임 대회 / 3 : 2 승
1995년 / 홍콩 / 제3회 다이너스티컵 예선 / 1 : 1 무
1995년 / 홍콩 / 제3회 다이너스티컵 결승 / 2 : 2 (3 PK 5) 패
1997년 / 도쿄(일본) / 한일 친선 경기 대회 / 1 : 1 무
1997년 / 도쿄(일본) / 월드컵 최종 예선 / 2 : 1 승
1997년 / 서울 / 월드컵 최종 예선 / 0 : 2 패
1998년 / 요코하마(일본) / 제 4회 다이너스티컵 대회 / 1 : 2 패
1998년 / 서울 / 한일 친선 경기 대회 / 2 : 1 승
1998년 / 방콕(태국) / 방콕 아시안게임 대회 / 2 : 0 승
2000년 / 서울 / 한일 친선 경기 대회 / 1 : 0 승

총 대표팀간 전적 67전 42승 14무 11패(90년 이후 7승 3무 5패)

67번이나 되는 축구 한일전이 열렸지만 그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경기가 몇 경기 있다.  한국 입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경기를 꼽으라면 1978년에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메르데카 배 대회에서 벌어진 4 대 0 대승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조광래, 차범근, 박성화, 김호곤의 릴레이 골로 1954년 한일전이 시작된 이후 가장 완벽한 승리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입장에서는 1974년 도쿄에서 벌어진 제 3회 한일 정기전의 4 대 1 승리를 가장 통쾌한 승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1974년 9월 28일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일본은 킥 앤드 러쉬의 전법으로 원정 경기의 부감을 짊어진 한국을 일방적으로 몰아 부여 결국 대승을 거뒀다.  특히 일본의 가마모토는 장신을 이용한 포스트 플레이로 3골을 넣으며 한일전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한국에게 안겼었다.

그렇지만 한일전 역사 최고의 4 경기를 꼽아 보라면 위의 경기들은 꼽히지 못할 것이다.
승패와 관계 없이 축구를 통해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전달해 주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 4경기로 인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축구 한-일전'이 되어버리기도 했던, 추억의 한일 축구전 4경기를 Replay해 본다. .

1.1997년 9월28일: '98 월드컵 아시아 예선  

아마도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감동적으로 본 경기를 꼽으라면 이 경기가 꼽힐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아직도 M방송국의 신모 해설자의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란 멘트가 귀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93년 도하의 비극이후 수세에 몰리던 한국은 급기야  98년 월드컵 예선에서도 압도적인 일본의 전력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 받게 된다. 특히 나카다-나나미로 이어지는 일본의 미드필더진은 한국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팀은 1997년 9월 28일 일본의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5만 울트라 니폰 응원단의 귀를 찢는 응원 소리를 들으며 원정 경기를 펼치게 된다. 무차별 공격으로 대 한국전에서 승리하겠다는 일본과 치밀한 수비로 공격을 막아낸 후 역습으로 승리를 노리겠다는 한국의 자세는 경기 초반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전반 9분 브라질 귀화 선수 로페즈가 내준 볼을 달려들던 수비수 오무라가 슛했지만 김병지가 잘 막아냈고, 전반 24분과 26분에 로페즈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한국은 미드필더 진영에서 장형석과 유상철이 일본의 나카다-나나미는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승부를 논하기는 이른 시기였다. 하지만 후반전에도 일본의 공격은 계속됐다. 후반 10분 나나미가 센터링 한 볼이 홍명보의 몸에 맞고 굴절된 볼, 이것을 달려들던 소마가 슛한 볼이 데굴데굴 굴러 크로스 바 맞고 밖으로 벗어 나는 등 일본의 공격은 아직도 거센 편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수비진에서의 단 한 번의 실수가  실점으로 연결됐다. 후반  20분 일본 미드필더들의 프레스에 막혀 백패스를 위해 볼을 끌던 고정운이 야머구치에게 인터셉트 당하고 만다. 야마구치는 현란한 드리블로 패스하는 척 하면서 3명의 수비수를 제치며 페널티 에이리어까지 전진 한 후 약간 앞으로 나와있던 골키퍼 김병지의 몸을 넘기는 환상적인 루프 슛으로 일본의 선취점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이후 한국팀은 당황한 나머지 패스 미스를 연발하며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 하지만 후반 26분 고정운과 교체 투입된 김대의가 파괴력 넘치는 돌파로 일본의 사이드를 위협하면서 조금씩 시합의 분위기를 한국쪽으로 끌어오게 된다. 그러던 후반 38분 이기형이 일본 수비수들의 견제 속에서 넘어지며 오른발로 감아올린 볼을 최용수가 오무라-아키타의 더블 방어를 뚫으며 서정원에게 패스한 것, 서정원이 침착하게 헤딩 슛... 드디어 대망의 동점골을 뽑아내게 된다. 거의 다 졌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얻어낸 동점골은 한국팀의 사기를 팍팍 올려주었고 반면 일본팀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한다. 일본으로선 선취골 득점 이후 잘 뛰던 로페즈를 빼고 중앙 수비수 아키타를 집어 넣은 소극적인 방법이 오히려 화를 불러온 셈이었다. 1 대 1 상황에서 공세를 계속하던 한국은 결국 후반 38분 최용수가 일본 골문에서 옆으로 흘려준 볼을 수비에서 공격으로 가담한 이민성이 20m 왼발 강슛으로 연결한다. 이 볼은 낮게 깔려서 일본 골키퍼 가와구치 앞에서 원 바운드 되며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2 대 1의 대 역전승. 이 경기에서 승리를 한 한국은 98 월드컵 경기 본선 진출을 사실상 결정지었고, 일본은 예선 최고의 위기에 직면했으며  결국 이 게임은 그 때까지 선전하던 가모 슈 감독 해임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말았다.

2. 최고의 접전,  최고의 경기
김진국의 헤딩슛

1971년 5월 3일 정말 쾌청한 일본 국립 경기장의 어느 오후. 이곳에서는 70년대 최고의 경기로 꼽혔던 제 18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준결승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스탠드에는 3만명의 관중이 꽉 차 있었고 그들 대부분이 일본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원정 경기에다 상대는 주최국 일본. 여기다 일본팀은 오꾸데라(후에 독일 프로 축구에 진출해서 차범근과 비교되는 일본의 축구 영웅), 나가이, 세다등을 주축으로 준준결승까지 4게임에서 모두 13 득점, 무실점의 탁월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의 축구팬과 언론 모두 자신들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하지만 경기 양상은 조금 다르게 진행됐다. 주위의 기대를 너무 의식한 일본팀이 전반에 좋지 못한 움직임을 보인데 비해  한국은 절대로 일본에게 지지 않는다는 생각 하나로 전반에 일본 선수들을 몰아 붙였다. 하지만 오버 페이스를 한 한국팀은 후반에 지치기 시작했고 , 하프 타임이후 정신을 차린 일본팀은 후반 11분 다까미의 롱 슛이 크로스 바를 때린 것을 시작으로 12분 나가이의 왼쪽 돌파에 이은 센터링 다까미의 슛, 13분 에노구찌의 롱 슛등 시종 한국을 몰아 붙이기 시작했다. 그 후 승부의 분수령이 된 후반 16분 오꾸데라-에노구찌로 이어진 볼이 페[널티 에이리어 안의 나가이에게 연결됐다. 이 때 한국의 수비수가 나가이를 밑어 붙였고 순간 국립 경기장의 모든 일본인들이 환호했다. 명백한 페널티 킥 찬스였다. 하지만 이런 일본인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태국인 주심 마니드 스리다라노프씨는 경기를 바로 진행시켰고 결국 전 후반 80분의 접전은 0 대 0으로 끝이 나고 만다. 이어진 연장전 20분에서도 한국은 김진국이 지능적인 심리전으로 일본의 공격진을 괴롭히며 골문을 잘 지켜냈다. 결국 승패는 승부 차기에서 갈리게 됐다. 일본은 첫번째 키커로 마음이 약한 에이스 오꾸데라 대신 주장 아사다가 찾지만 아사다가 찬 볼은 크로스 바를 맞고 튕겨 나와 버린다. 순간 침묵에 잠겨 드는 일본 관중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의 4번째 키커 고재욱의 실축 때 다시 한 번 열광하며 일본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후 승부 차기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승부를 가른 일곱번째 키커.  키커로 나온 다까다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지그시 골문을 응시한다. 한국의 골키퍼 유영화 역시 긴장하기는 마찬가지. 단 한 번의 슛만 막아내면... 유영화의 뇌리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넘나든다. 이후 본능적인 세이빙. 다까다의 찬 강 슛은 골키퍼의 펀칭에 맞어 골대을 한 참 벗어나 버린다. 마치 일본의 승리가 멀어지는 것처럼. 다음에 나온 한국의 7번째 키커 황재만은 여유있게 오른쪽 인사이드 킥으로 골키퍼 세다를 속이며 골인시키며 70년대 최고의 한일전 중 한 경기로 꼽히는 승부의 마지막을 결정지었다.  이 경기는 일본의 축구 전문지 ' 사커 '에서 조사한 일본 축구팬들이 뽑은 70년대 최고의 명승부 4경기 중 한 경기로 선정된 바 있다.

3.1967년 10월7일:  68년 멕시코 올림픽 예선

일본이 월드컵 무대에 진출 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었다. 그전까지 그들은 아시아 최강임을 뽐냈었지만 알게 모르게 세계 축구에 대한 갈증 내지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일본 축구인들이 최근까지 일본 축구의 세계 무대에서의 가능성을 내세울 때 공통적으로 말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멕시코 올림픽 동메달. 이것은 90년대 초반까지 일본 축구의 자존심을 지켜 주던 보루같은 사건이었으며  이 동메달의 시발점이 된 경기가 바로 1967년 10월 7일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벌어진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 예선 한일전이었다.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가을 오후 도쿄 국립 경기장은 5만여명의 일본 관중들로 꽉차 있었다. 김호-김정남으로 대표되는 수비진과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회택을 앞세운 한국은 원정 경기에서 일본을 이겨야 하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역시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가마모토를 앞세운 채 승리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합은 처음부터 일본의 페이스였다. 전반이 시작된 직후 마쓰모또의 헤딩 패스를 미야모또가 기습 선제골로 연결 시킨다 이후 37분에는 스기야마가 개인기를 뽐내며 추가골을 넣어 전반전은 2 대 0으로 일본의 리드로 끝나게 된다. 한국으로선 믿었던 김호-김정남의 수비진이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보여 준 것이 경기를 어렵게 풀어 나가는 원인이었다. 그러나 하프 타임에서 수비진을 안정시킨 한국은 후반 대 반격을 시작한다. 후반 시작하자 마자인 6분 이회택이 일본 수비수를 따돌리며 골대 정면에서 골을 성공시켰고 이후 24분 추가골을 넣으며 승부를 2 대 2의 원점으로 돌려 놓는다. 그렇지만 경기 내내 침묵을 지키던 일본의 대형 스트라이커 가마모토가 바로 1분 뒤인 후반 25분 세번째 골을 넣으며 일본이 다시 리드를 잡기 시작한다. 이후 당황한 한국. 그렇지만 미드필드에서 좋은 움직임으로 두번째 골을 어시스트 했던 김기복이 이번에는 동점골을 뽑아내며 팀을 위기에서 구출해낸다. 이후 양 팀은 공방전을 거듭했지만 추가 득점을 하지 못한 채 이 경기는 3 대 3으로 비기고 말았다. 한국으로선 종료 직전 날린 김기복의 중거리 슛이 골 포스트 맞고 나온 장면이 아쉬운 한 판이었다. 결국 일본은 이 경기에서 비긴 후 대 필리핀 전에서 15 대 0으로 대승을 거두며 숙적 한국을 골득실차로 따돌린 채 올림픽 본선에 진출 동메달까지 따게 된다.

4. 1993년 10월25일: 94월드컵 아시아 예선

도하의 비극. 말만들기 좋아하는 언론에서 참으로 그럴싸한 타이틀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이 경기.  하지만 이 '도하의 비극' 이란 말은 단순히 일본인들에게만 적용된 비극은 아니었다.  어쩌면 더 큰 비극은 우리 한국 축구 팀에게 왔었는지도 모른다.
9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게 절대 우세였던 한국은 이후 92년 J-리그의 출범이후 위기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 와중에서 열린 94년 미국 월드럽 최종 예선이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고  일본과의 숙명의 라이벌전이 93년 10월 25일 벌어졌다. 이미 대 사우디 전과 이라크 전에서 후반 막판 수비진의 실책으로 동점골을 먹어 1승 2무만을 기록한 한국은 월드컵 진출을 위해 1승이 반드시 필요했고 ,  1패를 안은 일본 역시 한국과의 경기에서 1승이 꼭 필요했었다. 미우라-라모스-기타자와를 앞세운 브라질 식의 공격 축구를 앞세운 일본은 이미 92년 열렸던 다이너스티 컵 결승에서 승부차기 승을 우리에게 거둔바 있어 이미 한국 축구에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경기 시작부터 별로 조짐이 좋지 못했었다.  일본은 하시라타니-이하라를 중심으로 한 수비진으로 굳게 자물쇠를 채우다 역습으로 전환할 때는 라모스의 스루 패스를 미우라나 다카끼에게 연결하는 전법으로 한국 선수들을 괴롭혔다. 한국은 믿었던 김주성-노정윤 투톱이 상대편 수비진에 묶이고 빠른 스피드로 측면 돌파를 노렸던 고정운의 빈 자리가 오히려 기타자와 등 일본의 재빠른 미드필더들에게 뚫리면서 시종 경기를 어렵게 끌고 나갔다. 특히 노정윤이 경기 시작 직후인 전반 5분경 골기퍼 마쓰나가와 맞선 일대일 찬스를 놓친 후 경기의 주도권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라모스의 패스가 살아 나면서 전반 11분 이하라의 슛팅을 골키퍼 최인영이 간신히 쳐내며 막아냈고, 전반 17분에는 나까야마의 슛을 홍명보가 걷어내는 등 경기 내내 끌려갔었다. 한국은 전반 33분 구상범의 슛이 가장 좋은 찬스였을 만큼 경기가 안 풀렸으며 전반 내내 미드필드를 일본에게 장악 당한 채 하프라인을 넘기기도 버거웠다. 후반 한국은 체력이 떨어진 노정윤 대신 서정원을 투입해서 일시적으로 전세를 뒤집기도 했지만 후반 15분 일본의 교체 멤버인 사와노보리의 센터링이 미우라의 오른발에 연결되며 결승골을 허용하게 된다.  이 한골로 승부는 결정났고 이후에도 한국은 이렇다 할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완벽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한국으로선 부상당한 주전 스트라이커 황선홍의 공백과 고정운을 공격이 아닌 수비에 넣어야 하는 등 어려움이 패인으로 작용했었다. 이 경기 이후 일본은 한국 축구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국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위치에서 항상 게임에 임하게 되며, 반면 한국은 이제 일본을 만만한 상대가 아닌 힘겨운 상대로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시합이었다.

보시다시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경기들이 많다.  다시 들어도 가슴이 뛰던 그 시절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일전 축구가 특별하다는 말에 동감하지 않을 팬들은 없다.  그리고 한-일전에서 진다는 생각을 쉽게 삼킬 수 있는 위인도 몇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한-일전에서의 감칠 맛 나는 승리 말고도 우리에겐 너무나 중요한 '축구 목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필자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것은 그토록 일본에게 진다는 발상이 억울하고 분통한 우리 모두가 어찌해서 '경기 결과' 외엔 대부분 그들에게 지고 있는데도 두눈 멀쩡히 떠서 침묵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에겐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도 않은 경기 한,두번 이기는 것으로 해서 우리 축구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감이 불식되어 버린다면 한일 축구전은 분명 사라져야 한다.  한국 축구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을 다 떠나서, 우리 축구가 발전하길 바란다면 한-일전 한판 승부에 모든 걸 걸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 축구의 향후 5-10년이 좌우되는 성급한 여론형성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급한 여론형성… 이 부분에서 다시 한번 우리나라 언론의 책임과 역할을 질타하지 않을 수 없다.  
  

총성 없는 전쟁: '98년 월드컵 예선  

후추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그 동안 황선홍, 허재, 김진호, 홍수환…등, 소위 한국의 언론에 의해 난도질 당한 우리 대한민국의 스포츠 영웅들을 재조명하면서 후추의 기본 취지와 철학을 이해하고 감싸주었던 많은 일반 스포츠 팬들이 있었는가 하면, 많은 숫자의 언론 종사자들이 의외로 후추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후추를 통해 여러 스포츠 기자들과의 만남도 가능했고 그들과 인간적으로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도 있었다. 지금도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그들 몇 명의 얼굴이 떠 오른다. 언젠가 그들도 이 글을 보겠지만 후추가 부족하나마 금번 '불 명예의 전당'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쩌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을 알기에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후추를 뿌리려고 한다.

후추 주방을 방문한 후추 동경 특파원의 말이 떠 오른다. "일본 스포츠 신문도 완전 쓰레기예요, 쓰레기… 완전히 쓰레기예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더 화가 치민다.  일본 스포츠 신문이 진정 그 지경이라면 왜 우리는 좀 덜 '쓰레기'스러울 수 없었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일본 꺾는 것을 민족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온갖 거칠고 낮 뜨거운 표현을 다 써가며 축구 한-일전의 승리를 강요 (?) 하던 그들이 어떻게 일본 스포츠 신문의 복사판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럴 때 그들의 투철한 경쟁심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엉뚱한 곳에 에너지 소비는 다 해버리고 정작 우리 스포츠 언론의 질적 향상과 팬들의 관전 문화를 선도해야 할 때 그들의 경쟁심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신문사 경영은 일본정도만 해도 OK?  얼굴을 보이라, 그대들의 반일 감정이여~~

70년 대 초반부터 시작해서 약 30여년 간의 한-일전 언론 자료를 종목 별로 뒤져 보았다.  복싱, 유도, 마라톤, 배구, 야구… 그 어느 종목에 있어서도 일본에 진다는 개념을 용서하는 언론사는 없었지만, 축구 이상으로 그 비난의 수위가 위험한 종목은 없었다.  아직까지도 여러 스포츠 팬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98 월드컵 아시아 예선' 대 일본전의 2 경기를 사례로 삼아 국내 언론의 '프로급 냄비 정신'을 철저히 파헤쳐 보려고 한다.  특히, 98년 9월 28일 (동경)과 같은 해 11월 1일 (서울)에서 열렸던 2 경기를 전후해 독자들이 목격해야만 했던 '제3차 대전', '웃지 못할 코메디', '한국 축구 죽이기'에 대한 헤드라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 바로 엊그제 같은 98년의 감동과 쓰라림을 다시 한번 느껴보도록 하자.

(1998년 9월28일 자 모 스포츠 신문 1면 톱기사)
'…한국과 일본의 전문가 및 취재진은 대부분 0-0이나 1-1 무승부, 혹은 한골차의 박빙승부를 예상하고 있어 선제골이 승부를 좌우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라고 보도했다.  서정원, 고정운, 이상윤의 측면 돌파, 기동력, 세트플레이, 중거리 슛에선 우리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미드필드 진의 세밀한 조직력은 일본이 더 앞서는 것으로 점친 이 기사는 '양팀이 워낙 백중세라서 선제골이 중요하다.' 란 결론을 내렸다.

HOOCHOO VIEW: 이 기사와 헤드라인은 두가지 측면에서 잘못 되었다.  첫째, 바로 이 무렵부터 난무하기 시작한 'XX 대첩' 이란 표현… 전쟁도 아니고 '대첩' 이란다.  그럼 강감찬,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은 누구란 말인가??  필요 이상으로 한-일전의 의미를 뻥튀기 시켜 건전하지 못한 반일감정만 심어 넣은 결과가 되었다.  둘째, 선제골... 아무 의미 없었다.  

(같은 면 관련 기사)
일본의 광적인 축구 열기를 표현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전쟁' 이란 표현을 써댔다.  정작 내용을 훓어 보자면, 그리 '전쟁'과 관련된 살벌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첫째, 28일 경기를 앞두고 일본의 팬들이 입장권 예매 개시 17분 만에 매진되었다.  둘째, 일본 방송사 프로그램 중 일본전의 분석을 끝냈다고 말하는 한국팀 감독을 보고 "저렇게 냉철한 인간은 싫다." 라고 말했다는 인신 공격성 발언.  셋째, 평소 원리원칙에 충실한 일본이 한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로페스의 여권 발급에 편법까지 동원되었음이 밝혀졌다. 넷째, 많게 1만명까지 되는 '울트라 니폰'의 광적인 응원이 동원될 예정이다.  

HOOCHOO VIEW: 굳이 '전쟁'의 개념을 도입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막말로 일본 애들이 한-일전을 앞두고 집단 삭발을 했다던가 혈서를 쓰고 경기장에 나타났다던가… 확대 해석, 과장 보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같은 면 관련 기사)
'축구 한국 콤플렉스 단번에 날리려는 강박관념' 이란 소제로 쓰여진 이 기사는 일본의 광적인 월드컵 열기의 배후에는 '카타르 도하의 비극'이 있다라고 단정을 지었다.  나아가 '일본인들은 경제뿐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한국을 앞서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축구만큼은 열세를 면치 못해왔다.  (중략)  그러나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미우라, 나카다 등 될성 싶은 떡잎을 일찌감치 브라질에 축구 유학 시켜 일본 축구의 영웅으로 만들었고 J리그의 열기, 팬 성원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을 앞지른다고 자부한다…. (중략) 도하의 비극 이후 4년을 준비해온 일본은 사무라이 정신, 야마토 혼을 선수들에게 주입시키며 반드시 승리, 프랑스 생드니 구장을 밟아야 한다며 전 국민적인 궐기를 기대하고 있다…' 라고 했다.  

HOOCHOO VIEW: 일본 사람이 쓴 기사인줄 알았다.  더 이상의 추측성 기사는 보기 힘들 것이다.  기사 어느 곳을 보더라도 현지 일본인들의 '자부심'을 증명해 주는 출처는 없다.  이 기사를 쓴 기자가 일본인이 아닌 이상 이토록 확고하게 일본인들의 기분을 대변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걑은면 하단 기사)

신경식 의원:            "정국에 청량제 됐으면"
임채정 의원:            "태극 전사들 눈빛 믿는다"
안택수 대변인:          "대한 남아 기개 떨쳐달라"
김태정 검찰총장:       "승전보 듣는 휴일 기대"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   "승리로 경제에 활력을"
성석제 소설가:          "평상심으로 임해주길"
이혜영 탤런트/가수:     "7-2정도로 이겼으면"

HOOCHOO VIEW:   "니들이 나가 해라"

(전장의 아들 보아라…서정원 칠순 노모 염원의 편지)
(모 스포츠 신문 9월28일 기사)
" (생략) 이번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늙은 이 에미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축구 선수를 아들로 둔 덕에 월드컵에 왜 나가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고 또 일본하고의 경기가 내 아들, 아니 대표팀만의 경기가 아닌 '온 국민과 국가의 경기' 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중략) 너와 네 동료들이 너무도 잘 알겠지만 왜 일본을 이겨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한다.  많이 배우지 못한 에미도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듣는 게 축구 얘기라 이번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HOOCHOO VIEW: 정, 제계 인사들의 총동원까지도 모자라서 이젠 서정원 선수의 노모까지 등장시켜 온갖 드라마틱한 요소를 삽입 시킨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  노모의 염원이란다.  공부 많이 하지 못하신 노친네의 글 치곤 너무도 감동적인 글이다.  대필을 하려면 정도 껏 해야지…

(98년 9월29일 모 스포츠 신문 1면 톱기사)
이민성, 서정원 황금골…

HOOCHOO VIEW: '전쟁'에 대한 일관성은 있다.

(98년 9월29일 자 모 스포츠 신문 )
1.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물청소: '9월26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우뚝 서 나라를 수호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이 목욕을 시작, 한-일전이 펼쳐지는 그 시간에도 여전히 시원한 샤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일본에게 이순신 장군은 곧 '쥐약'.
2. 충남 계룡산 정기막는 철탑 철거 발표: '도령이 출현, 천년 왕국을 건설한다'는 확신에 가까운 비결이 숨쉬고 있는 충남 계룡산 중 제일 봉우리가 높은 봉우리에서 지난 81년 세워 계룡산의 기운을 막는다고 끊임없이 민원의 대상이 되었던 철탑을 이전한다는 계획이 확정, 발표된 날이 바로 28일 이었다.  최고봉 이름도 하필이면 '천황봉'.
3. 태너 박인수 교수가 애국가를 봉창하며 위엄을 시종일관 유지한 데 반해, 일본 국가를 부른 사람은 말랑말랑한 팝가수 후세아키라였다.
4. 가락국수 체인점 44곳에서 공짜로 나눠준 '2002 월드컵 주먹밥'을 씹는 국민들도 비장감을 더했다.  주먹밥이란 전시 식량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5. '말 못하는 개들도 승리를 기원했다.  대구 계명전문대에서 펼쳐진 한국 애견협회 주최 애견대회 현장.  늠름한 국가 대표견 진돗개는 월드컵 마스코트로 유력시 되고 있는 '축구견'답게 '파이팅'은 외치지 못해도 '컹컹' 우렁차게 짖어댔다.
6. 기가 드센 우리 인사들이 경기장에 포진한 점도 한국 팀에게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다.  정주영, 정몽준, 김대중, 이홍구, 박태준, 김윤환 등 정력남들이 뿜어대는 강인한 기는 일본을 압도하고도 남았다는 평'

HOOCHOO VIEW: 98 월드컵 아시아 예선 대 일본전 2경기 통틀어 가장 황당하고 창의력 넘치는 기사, 압권 그 자체였다. 그래, 이왕 타블로이드 (Tabloid) 판 스포츠 신문이라면 이 정도의 배짱과 무지를 온 국민에게 떨쳐야 제 맛이란 생각이 든다.  브라보!!

(98년 11월2일 자 모 스포츠 신문 1면 톱기사)
기자들의 틈 사이에서 베이지 색 버버리 코트를 두르고 고개를 숙인 채로 경기장을 묵묵히 빠져 나가는 당시 한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의문 투성이 잠실 한-일전… 41년 만에 치욕' 이란 부제가 시선을 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이떻게 이럴 수가??  져 준 것인가, 방심 했는가, 아니면 한국 축구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인가?  0-2 완패… 그것도 일본에..'

HOOCHOO VIEW: 한국의 대표적인 스포츠 신문 첫 면에 실린 헤드라인으로의 부적절함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사를 쓴 기자가 축구공이라도 한번 차 본 사람이라면, 아니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는 스포츠의 단순 무식한 순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기자였다면 과연 이런 위험천만한 머릿기사가 나올 수 있었을지 궁금해 진다.  져 줘??  물론 한-일전의 패배가 특별히 실망스럽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게 특별한 반감이 들게 분위기 띄운 것도 애당초 기자들의 책임 아니었나??  

(모 스포츠 신문 11월 2일자 기사)

'하지만 홈에서 일본에 완패했다는 것은 차감독과 태극 전사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일이다.
전 국민이 염원했던 일본전 승리였기 때문이다. (중략) 결코 지지않겠다던 차감독과 선수들이 일본에 패함으로써 이제 한국 축구는 또다시 일본에 우위를 자랑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HOOCHOO VIEW: 반성?  감독과 선수들이 무슨 원조교제라도 했나?  경기에 지는 게 죄란 말인가?  우위를 자랑?  더 이상 일본 기자들 만나서 어깨에 힘 못 주는 신세가 되어서??  아직도 이날 경기 전에 벌어졌던 상황이 생생하다. MBC 방송국의 여성 리포터가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전국 생방송으로 경기장 스케치에서부터 붉은 악마 회장의 인터뷰까지… 정말 무슨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전시 상황'으로 분위기를 몰고 갔다.  국민의 염원??  한-일전 승리가??  더 이상 한-일전 승리가 국민의 염원이 아닐 때 우리 축구도 발전하고 진정한 해방도 찾아온다.

과격 표현, 확대 해석, 과대 포장, 추측 기사, 드라마화, 억지성 기사, 마녀 잡기… 한국 스포츠 신문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지난 98 월드컵 예선 한-일전 2경기를 통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드러났다. 과연 무엇을 위한 한-일전 승리란 말인가?  언론의 자극적이고 무분별한 기사 쓰기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전 국민의 관심과 기대를 극에 달하게 하고 일시적인 '채찍질'로 인해 선수들의 정신 무장을 새롭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지언정 좀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그토록 '염원하는' 한-일전에서의 승리 하나로 묻혀지고 감춰지는 한국 축구의 병패는 누가 무엇으로 치유할 것인가?  

스포츠 신문뿐만 아니라 유독 한-일전에 있어서 만큼은 대한민국 언론 전체가 중심을 잃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한국과 일본의 스포츠 신문의 '쓰레기 화'는 기정 사실로 보자.  보수 신문으로 정평이 나 있는 한국의 조선일보와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한-일전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일본인 이와타 유끼씨가 작년에 발표한 "신문 스포츠 기사에 나타난 내셔널리즘에 관한 연구:  한국, 일본 신문의 월드컵 축구 기사 비교를 중심으로" 란 석사학위 논문을 살펴 보면 양국 언론이 보는 한-일전에 대한 논조와 표현의 차이를 금새 엿볼 수 있다.
'한-일전 승리 기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성' (P73) 이란 부분에서 필자는 (1) 역사에 대한 언급 - '제2의 국치를 통쾌하게 설욕했다고 기술, (2) 일본을 특별히 의식한 내용 - '일본 언론이 패배한 저녁에는 "조용"했고 TV에서는 한국 승리를 "짧게", "그나마 사실보도만 했다" 고 기술  (3) '민족'을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 - '일본 응원단은 일본인 미우라 보다 귀화인 로페스에 대한 환호가 더 높았고 한국 응원단은 이를 "자존심 없는 행위' 라고 해석, 조선일보도 "비난을 샀다"란 표현으로 동의하는 입장을 보임.. 등을 꼽고 있다.  
한편 일본 언론 (아사히 신문)의 한-일전 승리에 관한 논조는 '승리의 열광을 독자에게 알리려고 하는 논조라기보다는 그날의 경기를 평가하고 일본 팀에게 제언하고 싶다는 논조를 볼 수 있다.'

양국 언론이 한-일전에게 패했을 때 나타나는 특성을 보자면 한국 언론은 (11월2일 자 조선일보) '선수의 이름까지 들어 통렬하게 비난' 했고 '일본 열도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약간 과장되게 기술' 했다.  일본의 경우 (9월29일 자 아사히 신문) '일본팀에 대한 엄격한 평가와 제언을 볼 수 있다.  조선일보와는 달리 개인의 실수를 들어 평가하는 내용은 없었다.'  라고 필자는 말했다.  양국 언론의 논조에 대한 결론으로 이 논문의 필자는 '한-일전 당일의 보도에 나타난 양국 신문의 차이는 아사히 신문이 양국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기술하는 데에 비해 조선일보는 '밝고 넘어서야 한다'고 적대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조선일보에는 과장된 표현들을 볼 수 있다…' (p81)  라고 기술했다.  

단순히 한 일본인의 석사 논문만으로 한-일 양국 언론의 전반적인 논조 차이를 완전하게 비교 분석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훌륭한 참조 자료는 될 수 있다고 본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국내 언론이 한-일전에 있어서 만큼은 가장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라고 하는 스포츠 신문이나 보수적이라고 평가 받는 조선일보나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한-일전을 접하는 독자들은 언론의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반 일 기사' 그리고 '전쟁'을 연상시키는 프로파갠다 (Propaganda)에 의해 축구 경기를 즐길 수 있는 그리고 이성적이며 냉철한 분석과 평가를 통해 한국 축구의 향후 대책을 모색할 수 있는 여유조차 상실케 된다는 사실이다.  한-일전을 지켜보는 대다수의 팬들은 오직 승패에 대한 감정만이 남아 있을 뿐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상처 그 이상의 소득은 기대할 수 없어진다.  더욱이 세계 속의 한국 축구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상대도 될 수 없는 일본과의 한, 두 경기를 통해서 말이다.  

이제 한-일전에 대한 국민의 관전 자세는 분명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언론의 역할이 숙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소모'가 아닌 '생산'으로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어제'가 아닌 '내일'을 향해 한-일 모두가 아시아 축구의 발전을 일궈낼 수 있는 동반자의 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언론의 접근 태도에 일대 변화가 절실한 때가 왔고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유치란 지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화합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기회임이 분명하다.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등의 분야에서 이런 미래 지향적인 양국 간의 파트너 쉽을 얻어낼 수 없다면 이젠 스포츠가 나서서 선봉장 역할을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또 다른 관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접근을 통해 국민들이 한-일전을 느끼고 관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대한민국 언론의 모습을 '염원'한다.  .        
  
사이버 특강 : '한-일전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이란 약방의 감초나 음식의 조미료와 같다.
관중 없는 경기장, 함성 없는 관중석이 얼마나 삭막하고 메마를 것인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응원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고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인이 된다. 팬이나 국민을 하나로 묶고 삶의 찌꺼기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정화작용을 한다. 그러나 과열 응원, 집단 소란, 이른바 훌리건들의 난동 등은 오히려 스포츠의 장애가 될 뿐이다. 우리의 응원은 그렇게 우려할 바는 아니지만 한일 축구전에서 볼 수 있는 살벌한 구호의 인위적이고 조직적인 응원,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응원도 썩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스포츠는 우리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일간 신문의 스포츠 면, 스포츠 전문지가 없다면 출퇴근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할까. 언론은 올바른 여론 형성과 국민 계도의 사명도 갖고 있고 스포츠는 건전한 심신 단련이 제일의 목표다. 따라서 선동이나 선정, 비난과 질책, 흥미 위주의 폭로성 기사는 정도가 아니다. 특히 한일 축구전 때 지나치게 애국적이고 승패에만 집착하는 우리 신문, 방송의 보도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손기정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지 55년, 우리는 아직도 일본에 대해 적대감과 피해 의식을 갖고 있다. 일제 36년이 얼마나 악랄했으면 그럴까. 그러나 그런 일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36년만의 소산은 아니다. 멀리는 삼국 시대부터 있어 온 잦은 왜구의 침입, 임진 왜란의 상처 등 그 뿌리는 깊다. 우리는 언제나 일본의 침탈 속에서 살아 왔고, 지금도 계속 일본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백년 동안 당해 온, 그래서 쌓인 그들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이 단 55년으로 치유되기는 물론 어렵다. 무엇으로든 그들을 한 번 눌러보고 싶은 욕구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스포츠요, 그 중에서도 축구라는 것을 우리는 비로소 알았다. 그렇기에 한일 축구 전에 그토록 열광했고 무조건 승리만을 바라는 것 아닌가.
축구에 관한 한 우리는 일본보다 항상 우세했다. 암울했던 일제 시대에도 우리 축구는 늘 일본을 압도했다. 나라를 찾은 후에도 우리 축구는 일본에 앞섰다. 광복 이후 일본과의 첫 공식 축구 경기는 1954년 3월, 도쿄에서 있은 스위스 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전이었다.
  
54년 스위스

한, 일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요,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대단해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야 할 예선전이었으나 일본 선수의 입국은커녕 우리 선수들의 일본 원정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 팀의 이유형 감독이 '만일 일본에게 진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고 대통령과 약속하고 얻어 낸 일본 행 허락이었다. 5대 1, 2대 2, 1승 1무승부로 우리가 승리,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6년 후, 마침내 일본 축구팀이 우리나라에 왔다. 62년 칠레 월드컵 극동지역 예선 1차전으로 1960년 11월 6일이었다. 이 때는 5. 16 군사혁명 직후로 역시 군사 정부에서도 일본 선수들의 입국에 난색을 표했다. 국제 경기 관례상 꼭 해야 하는 일본 국가의 연주와 일장기 게양을 과연 우리 국민들이 순순히 수용할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일본에 질 경우의 후유증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일본 선수들이 효창 구장에 섰고, 일장기도, 기미가요도 우리 국민들은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정치와 스포츠, 과거와 축구를 구별할 줄 아는 현명함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2대 1로 우리가 일본을 눌렀다. 이렇게 첫 일본 원정, 첫 일본의 한국 방문 경기에서 우리는 통쾌하게 승리했다. 일본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었다.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당연히 이기는 것으로 알았고 이겨 왔다. 지면 이상했고 이변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응원이나 언론 보도도 지금처럼 결사적이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았다. 가슴 속의 응어리를 토해내는 자발적인 응원이었으나 그만큼 순수했고 아량도 있었다. 축구에서만은 우리가 한 수 위라는 조금은 자만심이 깔린 언론 보도였다.
그러나 스포츠에서는 영원한 승자는 있을 수 없는 법, 질 줄만 아는 일본도 아니었다. 100년 계획을 세우며 '타도 한국 축구'의 기치를 내건 일본이었다. 90년대 들어 급성장한 일본 축구였다. 반면 우리는 너무 방심했다. 끝내는 우리를 따라잡고 더러는 우리를 이기기도 하는 일본이었다. 급하게 된 것은 우리 축구 협회와 축구 인들이었고, 불안을 느끼게 된 것은 축구 팬과 언론이었다. 응원으로라도 우리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했다. 책임이 무거워진 감독이요, 부담을 느끼는 선수들이었다. 압력을 가하는 국민이요, 승리만을 강요하는 언론이었다. 죽을 각오로 뛰겠다는 선수들이요, 무슨 수를 써서든 일본을 꺾겠다고 장담하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런 분위기여서 한일 축구 전에 칼을 찬 장군 차림의 갑옷 응원단장이 등장해도, 사생결단의 구호가 나와도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일본은 이미 상대 팀이 아니라 적이었다. 스포츠가 아니라 전쟁, 축구가 아니라 원수끼리의 대결처럼 살기마저 도는 관중석이었다. 축구 경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의 싸움을 격려, 고무하는 우리 응원단이었다. 온갖 전투 용어를 다 동원해가며 머리 기사를 장식하는 보도였고 골 넣은 선수, 육탄 방어에 능한 선수를 영웅으로 만드는 언론이었다. 그동안은 뒷전으로 미루던 축구였는데 일본을 눌렀다고 온 지면을 한일전 기사로 도배하는 신문이었다.
졌을 경우는 또 어떤가. 우리 땅에서 축구는 하루 아침에 설 곳을 잃는다. 지도자와 선수 뿐 아니라 축구인 모두가 역적이 된다. 질타, 비난, 야유, 욕설이 난무한다. 책임 전가와 회피, 면피성 발언, 탓, 감독 교체로 끝내 이어진다. 그런 관전 태도, 보도 자세는 다른 축구 경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 대회는 외면하면서도 국제 축구라면 무조건 '와~'한다. 우리의 능력이나 수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브라질을 불러 놓고도, 유고와의 친선 경기에서도 이기라고 졸라대는 관중이다. 승리를 부추기는 언론이다. 이런 식의 우리의 응원 문화로는, 그런 식의 보도로는, 우리는 축구 선진국이 될 자격도 없고 우리 축구의 발전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우리가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에 즐거움이 있고 정신이 있고 삶이 있기 때문이다. 재미와 함께 규칙 준수, 페어 플레이, 신사도를 익히고 능력의 향상, 협동의 미덕, 자기 통제력 등 사는 지혜를 우리는 축구 경기를 통해 배운다. 그런 축구라면 팬들도 그런 응원을 해야 할 것이다. 언론도 그런 방향으로 관중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응원에 비해 일본은 어떤가. 조직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위적이지는 않다. 도구를 이용한 요란한 응원은 있어도 섬찍한 구호는 없다. 칭찬이나 격려는 있어도 욕설이나 야유는 없다. 언론도 그렇다. 분석과 반성, 대안, 방향 제시가 많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보다 선진화된 응원이요, 충실한 기사다. 그런데 그것이 또 우리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스포츠고 몸싸움이 많은 축구이기는 하다. 응원석에서까지 점잖을 이유도 없고 한밤중 TV 중계를 보며 굳이 냉정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승패에만 집착하고 유독 한일전에만 기를 쓰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고 경기 내용인데 우리는 결과만을 따진다.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라지만 이것은 진정한 축구 팬의 자세가 아니다. 함성, 박수, 탄성이 자연스럽게 모아져 경기장이 뜨거워져야 한다. 그런 속에서 선수들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승리만을 강요하는 응원은 선수들에게 부담만 주고 경기를 거칠게 만든다. 한일 전이 우리 축구 성장의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한일 전이 우리 축구에 큰 걸림돌이 되었음도 부정할 수가 없다. 일본하고만 축구를 하는 우리가 아니다. 태국이나 이란,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하나의 상대일 뿐이다. 한일 전만으로 끝나는 우리 축구도 아니다. 한일 전에 우리 축구의 사활을 걸 까닭이 없다. 일본 축구가 과연 우리처럼 한일 전에 모든 것을 거는가. 이제 우리도 성숙해져야 한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축구요, 일본에게 이겼다고, 졌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언론도 바뀌어야 한다. 정작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야 할 신문, 방송이다. 국민 감정에 영합해 같이 흥분하고 승패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니다. 결과를 낳기까지의 과정을 철저히 분석하고 축구의 기본 정신도 강조해야 한다. 비난보다는 비판, 질책보다는 칭찬, 결과보다는 과정, 승패보다는 정신이 더 소중한 것이다. 국제 경기 못지 않게 중요한 국내 축구요, 한일 전 이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프로 축구다. 스포츠 신문의 일면은 왜 꼭 야구나 연예 기사여야 하는가. 유소년, 학원 축구는 기사로서 가치가 없는 것인가. 평소에는 외면하고 있다가도 왜 한일 전에는 그토록 열을 올리는가. 진실로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의 생활화를 바라고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서는 축구, 축구정신이 무엇인지, 월드컵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스포츠 신문들의 경쟁이 치열함을 모르지는 않는다. 방송의 시청률 다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선정, 선동, 흥미 등 자극적인 기사로 대응하는 것은 언론의 길이 아니다. 페어플레이, 신사도를 바탕으로 한 개인의 능력과 조직력의 극대화가 축구 경기의 본질이다. 이런 축구 관을 기초로 한 기사요, 보도여야 한다.

축구인 서기원

55주년 광복절. 이제는 한일 전을 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져야 한다. 시드니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2002년 월드컵이 머지 않은 이 시점에서 본궤를 벗어난 우리 식의 축구 응원, 여론을 오도하는 언론으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붉은 악마들이 울트라 닛본과 손을 잡고 공동 응원을 펼치기도 했고 축구를 사랑하는 전문 기자도 많아지고 있다. 즐기는 축구, 과정을 중시하는 축구, 내일을 생각하는 축구, 정신을 추구하는 축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젊은이들이, 진정한 팬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다.

-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하여 출처 표기를 못했습니다.
  만약 최초 작성자께서 이 글을 보시고 연락 주신다면 정확한 출처를 기록 하겠습니다.
  
  미디어는 파트너 [양종구 기자 (동아일보 스포츠 레저부)]  관리자 07·08·14
  미디어는 파트너 [양종구 기자 (동아일보 스포츠 레저부)]  관리자 07·08·11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