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특별시축구협회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FIFA의 역사
 관리자    | 2007·08·11 18:37
축구연맹(FIFA)은 1904년 5월 21일 파리의 프랑스체육협회연합 본부 뒷편에 설립되었다. 이날 국제축구연맹 설립 결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7개국 축구 협회의 대표들이 서명했다.

◇프랑스 - 프랑스체육협회연합(USFSA)
◇벨기에 - 벨기에체육협회연합(UBSSA)
◇덴마크 - 덴마크축구협회(DBU)
◇네덜란드 - 네덜란드축구협회(NVB)
◇스페인 - 마드리드축구클럽
◇스웨덴 - 스웨덴축구협회(SBF)
◇스위스 - 스위스축구협회(ASF)
  
▶조직의 정비
이틀 후인 1904년 5월 23일 열린 제1차 FIFA 총회에서 로베르 게렝(프랑스)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빅토르 E. 슈나이더(스위스)와 카를 안톤 빌헬름 히르츠만(네덜란드)이 부회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사무총장 겸 재정위원장에는 루이스 멀링하우스(벨기에), 부사무총장에는 루드빅 실로우(덴마크)가 임명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FIFA는 단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단체였기 때문에 이들 초창기 임원들이 해야 할 일은 매우 많았다. 전체적인 조직을 정비하면서 국가별로 각국을 대표하는 축구 단체인 축구협회를 설립하고 새로운 회원으로 가입하도록 해야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잉글랜드가 새로 설립된 FIFA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FIFA는 원래 유럽의 축구협회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나 1909년부터는 비유럽 지역 국가들이 가입하기 시작했다. 1909/19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입을 시작으로1912년에는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1913년에는 미국이 차례로 회원국이 됨으로써 FIFA가 국제적으로 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더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이미 마련한 상태였다.

▶회원국 수의 증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1914)이 FIFA에 준 타격은 컸다. 모든 국제 교류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미미한 수준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3월 1일 프랑스 출신 줄 리메가 3대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48세였던 리메 회장은 이후 FIFA에 자신의 삶을 걸고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그가 새로 이끌어 가게 된 국제축구연맹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회원국 수가 20개국에 불과했다. 영국의 협회들은 모두 함께 FIFA를 탈퇴했고 브라질이나 우루과이도 회원국이 아니었다. 줄 리메가 회장으로 있는 33년 동안 FIFA는 제2차 세계 대전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다. '줄 리메 시대' 라고 불리는 이 기간 동안 그는 FIFA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월드컵의 꿈을 실현시켰다. 줄 리메는 1954년 제5회 스위스에서 월드컵 개막 선포 후 회장직을 사임했는데 당시 FIFA 회원국 수는 무려 85개국에 이르렀다!

▶제1회 월드컵 개최
올림픽 경기는 자체적인 세계 대회를 개최하고자 하는 FIFA의 희망을 더욱 강하게 부추겼다. 그리하여 집행위원회의 강력한 제안에 따라 1928년 5월 FIFA 총회에서 FIFA가 주관하는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개최국을 선정해야 했다. 헝가리,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 우루과이가 개최를 희망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이유로 인해 처음부터 우루과이는 가장 강력한 개최 후보지로 떠올랐다. 1924년과 1928년, 두 번 연속으로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1930년은 우루과이의 독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930년 7월 18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백주년 기념 경기장(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제1회 월드컵의 막이 올랐다. 세계 축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4년 후, '월드컵의 아버지' 줄 리메는 그의 평소 소망대로 제3회 월드컵이 그의 모국인 프랑스에서 열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원칙대로라면 1942년에 제4회 월드컵이 개최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1938년 파리 총회에서 개최국을 결정하지 못해 1942년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다음 총회는 1946년 7월 1일에야 다시 열렸다. 이 총회에서 유일한 후보국이었던 브라질의 다음 월드컵 개최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영국 협회들의 재가입
1946년 영국의 네 개의 축구협회들이 FIFA에 재가입했다. 이 역시 줄 리메의 외교적인 수완 덕분이었다. 그는 아서 드루리, 스탠리 라우스 경과 같이 선견지명을 가진 인물들과 동반자적 협력 관계를 만들어 갔다. 4년 후 스위스에서 제5회 월드컵이 열리던 해 베른 총회에서 80세의 줄 리메는 회장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 1954년 6월 21일, 그는 최초의 FIFA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마지막으로 '월드컵의 아버지'는 우승한 독일팀 주장에게 그의 이름을 딴 '줄리메컵'을 수여한 뒤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설립 50주년
FIFA의 4대 회장에는 벨기에의 로돌프 윌리엄 실드레이어스가 선출되었다. 그가 취임하던 해 FIFA는 설립 50주년을 맞이했으며 회원국은 85개국에 이르고 있었다. 25년간 FIFA의 부회장으로 줄 리메를 도왔던 실드레이어스는 1955년 10월 사망했다. 1956년 6월 9일 그의 후임으로 아서 드루리가 선출되었는데 그는 이미 반 년 이상 FIFA 임시 회장직을 맡아 오고 있었다. 아서 드루리는 FIFA의 새로운 법규 제정을 위한 연구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58년 매우 발전된 모습의 제6회 월드컵 대회가 스톡홀름에서 개최되었다. 그는 1961년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61년 9월 28일 임시 총회가 열릴 때까지 FIFA의 운영은 스위스의 에른스트 B. 톰멘이 맡았다. 그는1954년, 1958년, 1962년 월드컵 대회의 조직위원회장으로서 국제축구연맹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 후 FIFA의 6대 회장으로 스탠리 라우스 경이 선출되었다.
신생 독립국들이 가장 먼저 취하는 조치 중 하나는 FIFA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회원국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월드컵 경기의 TV 중계 또한 전세계적으로 FIFA를 알리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FIFA는 사립 기관이었기 때문에 정부 보조금이나 외부의 지원금을 받지 않았다. 자금은 엄격하게 월드컵 대회를 통한 수익으로만 조달되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새로운 일을 성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커다란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새로운 일을 통해 조직을 강화하고 유지시켜 나가야만 했는데 스탠리 라우스 경이 이 모든 일을 해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6월 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 FIFA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브라질의 주앙 아벨란제 박사가 후임자로 임명되었다.

▶새로운 시대
1974년 제39차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주앙 아벨란제 박사는 축구를 단순한 운동 경기로만 여기지 않고 세계적인 축구 기술 발전을 위한 방법과 수단을 모색하고 동시에 이를 위해 새로운 세대를 준비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벨란제가 FIFA 본부 입성은 새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연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순전히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월드컵 대회에서 나오는 수익에만 의존해 왔었다. 따라서 FIFA는 의사 결정에 있어 어느 정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행정력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집중되어 왔었다. 아벨란제는 이렇게 행정적인 성격의 기관인 FIFA를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의지가 넘치는 활기찬 기업으로 바꿔 놓았다. 현재 FIFA 본부는 여전히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1974년 12명의 직원이 일하던 취리히베르크의 낭만적인 데르발트 빌라 대신 이제는 5개의 건물에서 120명 이상 되는 직원들이 계속 증가하는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세계화
지난 25년 동안 축구는 단지 전세계인이 즐기는 주요 스포츠로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방면으로 영향력을강화해 왔다. 무엇보다도 축구는 지역, 인종, 국가를 초월하여 그 모두를 포용해 왔다. 전세계적으로 약 2억 인구가 직접발로 뛰며 즐기고 있는 축구는 이제 레저 산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상업적으로도 큰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204개 회원국
1998년 6월 8일 파리에서 열린 제51차 정기 총회에서 후앙 아벨란제의 후임으로 스위스 출신 제프 S. 블라터가 FIFA 8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이미 23년간 FIFA에서 다양한 지위를 거치며 활동해 오다 마침내 세계 축구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1. 우르과이(1930년)
제1회 월드컵 대회를 우루과이에서 개최하기로 한 FIFA의 결정은 경제난에 빠져 있던 유럽 등 다른 모든 국가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우루과이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참가하려면 너무나 길고 힘든 바다 여행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축구 클럽들은 두 달 동안이나 주전 선수 없이 경기를 치러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요즈음에도 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제1회 월드컵 대회에서는 지금과 달리 예선전이 없었다. 13개 초청 참가국만으로 경기를 치렀으며 모든 참가국이 우루과이에 도착하고 나서야 대회가 개막되었다.
개막 경기에서는 프랑스와 멕시코가 격돌해 예상대로 프랑스가 4-1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월드컵 사상 최초의 결승전은 주최국인 우루과이와 이웃 아르헨티나의 숨막히는 한판 승부였다. 전반전은 2-1로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를 앞섰으나 우루과이가 반격에 나서 결국 4-2 우루과이의 승리로 끝이 났다. 우승팀인 우루과이에는 프랑스의 조각가 아벨 라플레르가 디자인한 우승컵이 수여되었다.


2. 이탈리아(1934년)
FIFA는 1930년 1회 월드컵 대회를 유치하는 데 실패했던 이탈리아를 2회 대회 개최지로 선정했다.
이탈리아의 우승하게 된 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1라운드 경기장을 아주 먼 곳에 배정하여 한 경기를 치르는 데 13,000km나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선수들이 대회 초반에 녹초가 되어 버렸다. 결국 결승에 진출한 이탈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맞아 후반 종료 8분 전까지 1-0으로 수세에 몰렸으나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며 2-1로 승리했다.
1934년 5월 27일부터 6월 10일까지 치뤄진 이 대회는 1회 대회 때보다 규모가 더 커졌다. 32개국이 참가를 신청해 지역 예선을 치러야 했으며 이 예선을 통과한 16개 팀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주최국도 예선을 거쳐야 본선 진출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 남미 국가들은 지난 대회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불참한 데 대한 보복으로 최상의 대표팀을 파견하지 않았다. 지난 대회 우승 국가인 우루과이도 대회에 출전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3. 프랑스(1938년)
3회 월드컵 대회는 유럽에 전운이 감돌고 강대국 간의 외교가 사라진 암울함 속에 프랑스에서 개최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예선을 통과했으나 팀 전체가 철수해 버렸고(선수 중 일부는 나중에 독일 소속으로 출전) 스페인은 내란으로 어수선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도 이 대회에 불참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맨발로 투혼을 발휘한 레오니다스의 4득점에 힘입어 브라질이 6-5로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파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는 이탈리아가 헝가리를 4-2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4. 브라질(1950년)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이탈리아 출신의 오토리노 바라시 FIFA 부회장은 월드컵 트로피를 점령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신발 상자에 넣어 침대 밑에 숨겨 두기도 했다.
출전 자격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월드컵 대회였지만 이 무렵에는 출전권을 확보한 팀들은 철수하고 이미 탈락한 팀들이 출전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인도 대표팀은 FIFA가 맨발로 경기에 뛰지 못하도록 하자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결국 13개 팀만이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월드컵 대회가 재개되었고 우루과이가 '결승전 아닌 결승전'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그에 앞서 미국은 벨로 호리존테에서 벌어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했으며 상 파울로에서는 스웨덴이 이탈리아를 맞아 3-2로 승리를 거두었다.
미니 리그 형식을 띤 이 대회에서는 브라질, 스웨덴, 스페인 및 우루과이가 결승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주최국이었던 브라질은 우루과이와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리오데자네이로의 마라카나 홈구장에서 17만 4천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2-1로 패하고 말았다.

5. 스위스(1954년)
브라질의 마라카낭 경기장에서의 열광적인 승부 이후 4년이 지나 월드컵은 다시 유럽, 그 중에서도 조용한 나라 스위스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경기장 분위기는 박진감 넘치는 승부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5회 월드컵 대회에는 특히 고득점 경기가 많았고 서독의 예상치 못한 우승도 화젯거리였다. 또한 이 대회에서는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모든 선수들이 등번호를 달고 출전했다.
28개의 국제 대회와 올림픽 대회에서 패한 적이 없는 헝가리는 푸스카스, 보즈시크, 콕시스 및 히데구티가 주축이 된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그러나 '베른 전투'라는 오명을 얻었던 브라질과의 경기 이후 헝가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팀은 선수 세 명이 퇴장을 당했고 경기 후에도 선수들이 상대팀 탈의실로 몰려가 몸싸움을 벌이는 등 불상사가 일어났다.
결승전에서 헝가리는 1회전에서 8-3으로 대승을 거뒀던 서독을 맞아 경기 초반에는 2-0으로 리드했으나 결국 3-2로 패하고 말았다.

6. 스웨덴(1958년)
지난 대회가 스위스에서 개최된 데 이어 1958년 월드컵 개최 국가로 스웨덴이 선정되었으며 월드컵의 창시자인 줄 리메가 1956년 10월 16일 83세를 일기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브라질은 17세의 신예, 펠레의 활약으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웨일즈와의 경기에서 득점한 데 이어 준결승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5-2로 브라질의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결승전에서도 두 골을 넣어 주최국인 스웨덴을 5-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 대회에서 프랑스 선수 쥐스트 퐁텐느가 무려 13득점을 올렸으며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또한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0-0 무승부를 기록한 경기가 나왔는데, 바로 1회전에서 벌어진 잉글랜드와 브라질의 경기였다.

7. 칠레(1962년)
7회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지만 대표 선수인 펠레가 멕시코와의 개막전에서 부상을 입어 남은 경기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다. 산티아고에서 벌어진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아마릴도, 지토, 바바가 연이어 골을 터뜨리며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7회 월드컵은 이탈리아와 칠레의 산티아고 경기에서 이탈리아 선수들이 두 명이나 퇴장 당하고 칠레 선수의 왼쪽 주먹으로 일격을 당한 이탈리아 선수의 코가 부러지는 등, 월드컵 역사상 가장 악명을 떨친 대회로 기록되었다.
브라질, 다시 정상에 등극


8. 잉글랜드(1966년)
1930년에 시작된 월드컵 대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권위의 축구 대회로 자리를 잡았다.
런던에서 전시 중이던 줄리메 컵이 도난 당하는 소동이 벌어졌다가 며칠 후 런던 남쪽의 한 교외 앞뜰에서 피클스라는 개가 발견하여 관련 당국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펠레는 불가리아 및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치열한 몸싸움에 시달렸으며 월드컵 3연패의 신화를 달성하려는 브라질의 노력도 좌절되고 말았다. 알프 램지 감독(이후 알프 '경'으로 작위를 하사 받음)이 이끄는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 열린 서독과의 숨막히는 결승전에서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4-2로 감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지오프 허스트는 최대 논란을 일으켰던 골을 포함해 최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크로스 바를 맞고 튕겨나온 공이 정말 골 라인 안쪽에 떨어진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분분하다.

9. 멕시코(1970년)
9회 월드컵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축구 경기가 TV로 생중계되었다. 방송국의 요청으로 일부 경기는 낮 12시에 시작되었는데, 이 때문에 멕시코의 혹서를 견디며 경기를 치러야 했던 많은 선수들과 감독의 불만을 샀다.
이 대회에서는 이전의 두 대회에서 난무했던 폭력 사태는 없었으며, 1950년 월드컵 때와 마찬가지로 단 한 명의 선수도 퇴장당하지 않았다. 또한 처음으로 선수 교체가 허용되었고 옐로 카드와 레드 카드가 등장했다.
다시는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펠레가 복귀한 브라질은 클로도알도, 게르손, 리벨리노, 토스타오, 자이르징요, 카를로스 알베르토 등 최우수 선수들로 드림 팀을 구성하여 통산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
멕시코 시티의 아즈테카 경기장에서 벌어진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4-1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 브라질 선수들은 춤을 추며 환호했다. 특히 자이르징요는 모든 경기에서 득점을 올린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는 준결승에서 서독과 대접전을 벌였으며 월드컵 사상 최초로 연장전에서만 다섯 골이 터지며 이탈리아가 4-3으로 승리했다.

10. 독일(1974년)
'토탈축구'의 등장으로 유명한 이 대회에서는 개최국인 서독이 전력 질주와 수시로 위치를 바꾸어 가며 경기를 펼치는 방식을 통해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 주었고 결국 새로 제작된 FIFA 월드컵을 처음으로 품에 안았다.
요한 크루이프가 주축이 된 네덜란드는 아르헨티나를 4-0, 브라질을 2-0으로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서독의 '폭격기' 게르트 뮐러의 결정적인 결승골에 2-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11. 아르헨티나(1978년)
1930년 우승 문턱에서 아쉽게 주저앉았던 아르헨티나는 1978년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 대회에서 마침내 우승컵을 거머쥐게 되었다. 결승전에서 국민들의 열렬한 응원에 힘입어 크루이프가 정치적인 이유로 불참한 네덜란드를 누르고 패권을 차지했다.
1라운드 그룹별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에 패해 결승 진출이 불투명했으나 페루와의 경기에서 6-0으로 크게 승리함으로써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는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렐라, 오스발도 아딜레스, 마리오 켐페스 등의 선수들이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마리오 켐페스는 모두 여섯 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에 올랐다. 아르헨티나는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네덜란드를 3-1로 물리쳤다.

12. 스페인(1982년)
회전을 골 득실 차로 간신히 통과한 이탈리아는 2회전에서 놀랍게도 브라질을 꺾고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세 번째로 우승컵을 안았다.
브라질은 지코, 소크라테스, 팔카오, 에데르 같은 선수들이 계속되는 공세를 펼쳤으나 결국 파올로 로시의 해트 트릭으로 3-2로 패하고 말았다. 반면에 이탈리아는 결승전까지 진출하여 서독을 3-1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로시는 6득점으로 최다득점 선수의 자리에 올랐다.

13. 멕시코(1986년)
13회 월드컵 개최지가 멕시코로 결정됨에 따라, 멕시코는 월드컵 대회를 두 번이나 개최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사실 이 대회는 원래 개최 예정지였던 콜롬비아가 경제난을 이유로 1983년에 개최 포기를 선언하여 멕시코에서 열리게 된 것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멕시코에서는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긴 했지만 다행히 경기장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브라질은 8강전에서 프랑스에 승부차기로 패해 탈락했고, 준결승에 진출한 프랑스는 서독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라도나는 잉글랜드와 벨기에를 상대로 각각 두 골을 터뜨리며 아르헨티나를 결승까지 이끌어갔다. 특히 그가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넣은 두 골 가운데 하나는 핸들링에 의한 것이었고 나머지 한 골은 가장 멋진 슈팅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나중에 마라도나는 기자 회견에서 공이 자신의 손에 맞은 것이 아니라 '신의 손'에 맞은 것이었다고 말해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즈테카 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는 11만 5천여 관중의 환호 속에 서독을 3-2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14. 이탈리아(1990년)
월드컵 대회에서 방어 위주의 단조롭고 지루한 경기가 계속되고 승부차기로 승부가 결정나는 경기가 많아지자 사람들은 실망에 빠졌다. 서독과 아르헨티나의 결승전은 월드컵 사상 가장 재미없는 경기였는데, 경기 막바지에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패널티 킥이 성공하면서 서독이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결승전 사상 처음으로 한 골도 득점하지 못하는 망신을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두 명의 선수가 퇴장 당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 주최국인 이탈리아는 준결승에서 만난 아르헨티나를 손쉬운 상대로 생각했으나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지고 말았다. 또 다른 준결승에서는 서독이 잉글랜드를 승부차기로 이겨 결승에 진출했다.

1990년 월드컵 대회에서 로제르 밀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38세였던 그는 프랑스 리유니온 섬의 중위팀인 JS 생 피에르와즈 팀의 무명 선수에 불과했지만 은퇴를 앞두고 대회에 출전하여 카메룬을 8강까지 끌어 올리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15. 미국(1994년)
사상 최대의 미국 월드컵은 브라질이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득점 없는 무승부를 기록한 뒤 결국 승부차기로 우승컵을 차지하게 된 실망스러운 결승전으로 그 빛이 바래고 말았지만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골이 터지면서 열기를 더해 갔으며 놀랄 만한 사건도 많았다. 이전의 16번의 월드컵 경기에서 단 1승도 거둬 본 적이 없었던 불가리아는 독일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준결승에 올랐다. 한편 1986년 대회에서 아르헨티나의 영웅으로 떠오른 디에고 마라도나가 약물 양성 반응을 보여 본국으로 돌아가는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다. 또한 미국과의 경기에서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고국으로 돌아간 후 며칠 만에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주최국인 미국은 2회전에서 브라질에 지고 말았지만 1회전을 통과함으로써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브라질은 대회 최강팀이었으며 비록 결승전은 싱겁게 끝났지만 우승할 자격이 충분한 팀이었다.  

16. 프랑스(1998년)
16회 FIFA 월드컵은 32개 팀이 64경기를 펼친 최대 규모의 대회였다. 네 개 팀으로 구성된 총 여덟 개 조가 프랑스 전역에 새로 건설되거나 개보수된 경기장 열 곳에서 일제히 개막 경기를 치렀으며 결승전은 파리 북부에 새로 건설된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본선 진출국이 32개로 늘어나 사실상 30개의 티켓이 배당되었고, 아프리카 및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에게 출전 기회가 더 많이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유럽 두 팀과 아메리카 한 팀,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 한 팀 등 모두 네 개 팀으로 한 조를 구성하여 지역적으로 고르게 안배하였다.

-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하여 출처 표기를 못했습니다.
  만약 최초 작성자께서 이 글을 보시고 연락 주신다면 정확한 출처를 기록 하겠습니다.
  
  2006년 KFA 기술보고서  관리자 07·08·11
  축구용어사전  관리자 07·08·11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