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특별시축구협회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안녕 ! 한국 축구의 성지' - 3편. 시간, 동대문 운동장을 말하다
 관리자    | 2007·09·10 10:05
◆ 역사속으로 사라질 동대문운동장

△ 원로 축구인들과 동대문 운동장

<김지성 선생이 애꾸눈이 된 까닭>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제5회 월드컵과 1956년 홍콩에서 개최됐던 제1회 아시안컵에 한국 축구를 대표해서 출전했던 김지성 선생(1981년에 사망)은 한쪽 눈동자가 없다. 연희전문 출신인 김지성선생이 1960년대 초에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졌던 연세대학과 고려대학 OB 축구경기에 출전 중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고려대학 OB 선수로 이기주 선생이 함께 뛰었는데 이기주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와일드 플레이로 유명한 분이셨다. 나이가 지긋해 졌는데도 여전히 거칠게 경기장을 휘젓고 있던 중 김지성선생을 쓰러뜨렸다. 쓰러진 김지성 선생이 이기주 선생의 다리를 찼더니 이기주 선생은 사정없이 축구화 바닥으로 김지성선생의 얼굴을 짓밟았다. 이때 축구화 바닥의 스터드가 김지성선생의 한쪽 눈동자를 터뜨려 버렸다.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김지성선생은 한쪽 눈에 인공눈동자를 박고 다니셨다.

<긴장 때문에 빼 버린 단어>

장덕진 제31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의해 1971년 5월 25일 서울운동장에서 '제1회 박대통령배 쟁탈 아시아축구대회'가 열렸다. 처음에는 대회명칭 그대로 아시아지역에 있는 국가들만 초청해서 치르는 축구 대회였다. 그러나 차츰 대회의 역사와 권위가 높아지면서 제11회 대회부터는 박(朴)자를 빼고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로 명칭부터 바꾸면서 유럽과 남미의 프로축구팀들도 초청했다.

1981년 7월 13일부터 26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1회 대회에서는 아시아국가들 외에 서독, 프랑스, 아르헨티나, 브라질, 말타, 리히텐슈타인, 우루과이 등에서도 팀을 보내왔다. 각국 단장들로 가득 찬 본부석은 엄숙하고 무거웠다. 개최 선언을 하게 된 손수영 부회장은 그런 분위기에 억눌려 있었던 듯 했다. 마이크가 설치된 연단 앞에 나설 때부터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보이더니 “지금부터 제11회 대통령배 국제_대회”, “축구”라는 말을 빼먹었다. 아차, 싶었던지 잠시 뜸을 드린 뒤 “대회 축구를 개최하겠습니다.”라고 “대회”와 “축구”의 순서를 바꾸어서 선언해 버렸다.

<“너 같은 공짜손님 때문이야”>

말단 기자 시절부터 축구를 담당했던 윤경헌 중앙일보 체육부장이 오랜만에 축구 경기장을 찾은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고 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입장권을 받는 사람에게 얼굴만 내밀고 그대로 들어갔다. 그때는 기자석을 중앙에 있는 본부석 바로 옆에 항상 마련해 주었다. 윤경헌 부장이 기자석에 앉으려다 말고 본부석을 바라보았더니 이수환 축구협회 전무 한 명밖에 없었다.

텅 빈 곳은 본부석뿐 아니고 스탠드 전체가 거의 빈자리였다. 윤부장이 이수환 전무에게 “경기장이 왜 이렇게 썰렁하지요?”라고 물었더니 이 전무가 입에 물었던 담뱃불로 윤부장의 손잔등을 문지르면서 “너 같은 공짜 손님이 많아서 그렇다.”라고 고함을 치더라는 것이었다. 그 뒤 두 사람 사이는 다시 원만해졌지만 윤경헌 부장의 손잔등에는 여전히 담뱃불에 덴 상처가 남아있다.

<촌놈들이라 해서 도둑맞은 1골>

1973년 3월의 일이었다고 했다. 대한축구협회 주최 전국고등학교 축구연맹전 결승전 경기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서, 진주에서 자란 조광래 전 FC 서울 감독으로서는 생전 처음 밟아보는 땅이었다. 파랗게 돋아 오르는 잔디가 인상적이었는데 상대팀은 전국고교축구의 최강 한양공고 팀이었다.

조광래 감독에 의해 먼저 1골을 뽑아낸 진주고교팀이 1-0으로 리드하고 있는데 주심이 진주고 골키퍼가 고의적으로 시간을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간접 프리킥을 한양공고팀에게 하도록 했다. 판정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이었는데 진주고 선수들이 미처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프리킥 휘슬을 부는 통에 어이없게 1골을 잃으면서 공동 우승으로 경기를 끝내게 됐다. 조광래감독으로서는 ‘서울운동장’하면 제일 먼저 그때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기쁨과 원망을 함께 느끼게 된다고 했다.

<전남 드래곤즈 허정무 감독, '빗속의 수중전' 추억>

축구인으로서 참 기억이 많은 곳이다. 박스컵을 비롯해 올림픽, 월드컵예선을 모두 그곳에서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경기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 말레이시아전이다. 당시 수중전을 치렀는데 아마드에게 골을 얻어맞고 패했던 아쉬움이 있다. 참 많은 기억이 있는 곳인데 사라진다니 안타깝다. 그래도 월드컵 전후로 좋은 축구경기장이 많이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징성인 측면을 생각해 동대문 운동장을 남겨놓는다는 것은 조금 아닌 것 같다. 논리적인 면도 그렇고, 가만히 놀리는 곳을 그대로 놔두는 건 조금은 그렇다. 차라리 그곳을 개축하던데 싹 뜯어내고 축구 전용구장을 만들어서 계속해서 축구를 하게끔 하는 것은 몰라도 그대로 놔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래중학교 정재권 감독, '발가락 부상, 월드컵 직전 하차 아픔'>

개인적으로 94년 미국 월드컵 직전에 보카 후니오르스와의 친선경기에서 새끼 발가락 부상을 당해 월드컵 본선에 못 간 기억이 있는데 그 아픈 기억이 서린 곳이 바로 동대문 운동장이다. 동대문 운동장은 서울 중심지에 있다 보니 축구 열기가 정말 대단했던 곳이다. 많은 팬의 모습에 선수들이 부담감을 느끼게 보다는 옛날 고향집에 찾아갈 때 느낄 수 있는 푸근함이 더 많았던 곳이다.

예전부터 스포츠는 국민을 웃고 울게 하였던 매개체였다. 축구 역시 그 가교 역할을 했다고 본다. 서울시에서도 많은 생각을 했겠지만 동대문 운동장은 예전부터 쭉 내려져 온 국가관의 혼이 깃들여져 있는 장소다. 동대문 운동장의 정통성을 잘 살려서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동대문 운동장을 국민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체육시설의 일환으로 재탄생시켜준다면 좋겠다.

<경남 FC 박항서 감독, '동대문 잔디 밟는 게 꿈이었다'>

우리 세대와 선배 세대들에게 동대문 운동장이라는 곳은 추억이 너무나도 많은 곳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잔디 구장도 많지 않아서 결승전에 올라가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고등학교 때는 동대문 운동장 잔디를 밟아보는 게 꿈이었다. 박스컵을 비롯한 국제 대회의 모든 경기가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렸던 추억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럭키 금성에서 뛸 당시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몇 시즌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당시에도 전기, 후기리그 챔피언 결정전이 있었다. 그때 포철이 전기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우리가 후기 리그 우승을 했는데 동대문 운동장에서 포철에 졌던 아쉬운 추억이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기쁜 추억이 있다. 경신고 1학년 시절 동대문 운동장에서 벌어진 고교종합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었기 때문이다.

축구장이든 야구장이든 60년대부터 잠실 주경기장이 생기기 전까지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 스포츠의 메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서울시가 동대문 운동장의 용도 변경을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체육인으로서 역사가 서려있는 동대문 운동장이 사라진다고 해서 너무 아쉽게 생각한다. 축구인으로서 축구장이 없어지는 걸 보면 아쉽다. 잘 활용해서 축구장이 한 면이라도 생길 수 있는 방법이 있길 바란다. 좋은 방향의 해결책이 있다면 힘은 미약하지만 동참하고 싶다.

<유비사커 유상철 감독, '고교시절, 해트트릭 추억 담긴 동대문운동장'>

고등학교 시절 동대문 운동장에서 벌어졌던 고교대회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잔디 구장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결승에 올라야 잔디 구장에서 뛸 수 있다는 선수들의 각오가 대단했다. 그 중 동대문 운동장은 가장 큰 운동장이었다. 그래서 동대문 운동장에 대한 추억이 아주 많다.

프로에 있을 때도 가끔 거기서 경기를 뛰었고 국가대표 선수로서도 거기에서 뛴 적이 있다. 동대문 운동장은 안 좋은 기억보다 좋은 추억이 더 많은 곳이다. 서울 중심가에 있다 보니 팬들도 꽤 많이 왔고, 다른 운동장보다 동대문 운동장 자체가 트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탠드와 운동장이 가까웠기 때문에 거의 전용 구장과 같은 분위기가 났던 곳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축구장이 상암도 있고 잠실도 있으며 운동장 자체도 시설과 잔디 면에서 이전보다 좋아진 게 사실이다. 사견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없애기보다는 프로 경기도 할 수 있는 잔디를 깔고 트랙을 없애서 전용 구장을 만든다든지 했으면 좋겠다. 최대 2만 명수용의 전용 구장은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프로축구 활성화 등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동대문 운동장과 같은 역사가 있는 운동장을 철거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동대문 운동장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소이고 팬의 입장에서도 교통편이 어려운 곳이 아니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을 것이다.

선수 때 뛰었던 경기장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나 아쉬운 면이 많다.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곳인데 빌딩을 지어버린다면 동대문운동장은 그저 기억 속에만 남을 뿐 현실 속에서는 없어져 버릴 것 아닌가? 그래서 왠지 삭막하다는 느낌도 든다. 젊은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뿐만 아니라 나이 드신 분들은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추억도 많을 텐데 없어진다니 아쉽다.

<대구 FC 변병주 감독, '변병주라는 선수가 만들어진 곳'>

개인적으로 동대문 운동장하고는 무척 인연이 깊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통령배 고교축구대회에 나갔는데 그 운동장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준결승에서 2골을 넣어 2-0으로 이겼고 득점왕과 최우수 선수상을 모두 차지했던 기억이 난다. 또 국가대표로 데뷔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82년도에 동대문 운동장에서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를 했었는데 그때 프랑스팀과의 개막전에서 첫 골을 쏘아 올렸고 대회 동안 6골을 기록하며 우승도 했다. 변병주라는 선수가 만들어졌고 스타가 되었던 곳, 그곳이 동대문 운동장이다.

그런 운동장이 사라진다니 많이 아쉽다. 추억이 담긴 운동장이 다른 용도로 살아남는 게 아니고 그냥 없어진다는 것은 왠지 예전의 발자취가 없어지는 것 같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동대문 운동장은 비단 우리 세대 출신의 선수들뿐만 아니라 일반 팬들에게도 많은 기억이 살아숨쉬는 곳이다. 전용 구장으로 만들어서 또 다른 서울의 팀이 생기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거나 유소년 선수들을 육성하는 연습장으로 활용 등 여러 가지 방안이 있는 만큼 동대문 운동장을 살렸으면 좋겠다.

[플라마ㅣ이의재 고문/김태석 기자]
  
  축구경기규칙서  관리자 07·09·12
  '안녕 ! 한국 축구의 성지' - 2편. 2007년 9월의 동대문 운동장  관리자 07·09·10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