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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 한국 축구의 성지 1편 '제 1편' 슬픈 현실
 관리자    | 2007·09·10 09:58
◆ 역사속으로 사라질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과 한국축구가 영원히 인연을 끊게 됐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동대문운동장이야말로 한국축구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동대문운동장자리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이전까지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됐던 ‘훈련원’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이 이곳에서 항상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공을 차는 날이 종종 있었다. 1905년 6월 10일, 곽한승, 김종삼 등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황성기독청년회’와 궁내부 예식원 주사 현양운을 중심으로 한 유지 30여 명의 ‘대한체육구락부’가 훈련원에서 축구경기를 했다.

경기규칙도 모르고 심판도 없이 자기들끼리 뻥뻥 공을 차는 무질서한 경기였으나 이것이 한국 최초의 축구경기였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사람들에 의해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이후 울분에 가득 찬 이 땅의 젊은이들은 축구로서 그 울분을 달랬으며 축구를 하는 장소는 주로 ‘훈련원’ 자리였다. 기독청년회에 맞서기 위해 불교신자들을 중심으로 창단한 ‘불교청년회’ 그리고 평양에서 순수한 축구인들이 만든 ‘무오단’과 역시 축구만을 목적으로 창단된 ‘일광구락부’ ‘금강구락부’ ‘한양축구단’ 등이 속속 등장하게 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종합경기장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조선사람들의 항일운동을 스포츠 쪽으로 돌리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5년 10월 15일, ‘훈련원’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경성운동장’이 들어서게 됐다. 총 공사비가 25만 원이나 투입됐던 큰 사업이었다. 입장요금이 10전이었을 때니까 25만 원이 얼마나 많은 돈인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30만 명이었다. 그런데 ‘경성운동장’의 주경기장(축구와 육상전용구장)의 인원수용능력이 1만 6천 석이었으니까 그때로서는 대단히 큰 경기장이었음도 알 수 있다. 그 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증축해서 2만 5천4백 석으로 늘어났다. 경성운동장이 완공된 바로 그 다음날 이곳에서는 제1회 조선신궁대회가 열렸으나 축구경기는 하지 않았다.

경성운동장에서 처음 축구경기를 하게 된 것은 1927년 11월 2일부터 4일까지 거행된 제8회 전조선축구대회 때였다. 중학부, 전문부, 청년부로 나누어 실시되던 전조선축구대회가 제8회 대회 때부터는 중학부와 일반부로 나뉘어서 거행됐으며 중학부에서는 평양의 숭실중학, 그리고 일반부에서는 서울의 연희전문이 각각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숭실중학에서는 송혜덕 박태현 오용팔 김영근 등이 주축이었으며 연희전문에서는 정인승 이영민 오봉환 김윤기 등이 이른바 스타플레이어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 뒤 1958년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을 경성(京城)으로 부르게 된 것이 일본사람들 때문이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부터 ‘조선’은 ‘대한’으로 ‘경성’은 ‘서울’로 모두 고쳐 쓰게 됐는데 어째서 경성운동장만은 1958년에 이르러서야 ‘서울운동장’으로 부르게 됐는지 그 연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956년 8월 26일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박사가 직접 경성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관전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6일부터 15일까지 홍콩에서 개최되는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지역예선인 한국팀과 타이완팀의 경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모처럼의 국제경기라 수많은 관중이 경성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스탠드가 모자라서 그라운드에까지 내려온 관중을 내보내기 위해 말을 탄 기마 경찰대가 동원됐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벌컥 화를 냈다. “축구를 한다기에 나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이곳에서는 말들이 축구를 하는가?” 경호관들이 무슨 말 뜻인지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이승만 대통령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당장 기마 경찰들을 철수시켜, 신성한 축구 경기장에 말들을 몰아넣다니, 이런 몰상식한 사람들.” 이승만 대통령의 스포츠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깊었다는 얘기였다.

1967년 8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11회 메르데카컵축구대회에서 한국선수들이 우승을 차지하고 돌아왔을 때의 일화도 있다. 선수단이 청와대로 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승전보를 전하자 박대통령은 “그래, 장해요 아주 훌륭해요.”라고 칭찬하면서 “내가 우승 축하선물로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을까?”라고 물었다. 선수들이 “밤에도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서울운동장에 조명시설을 해 주십시오.”라고 일제히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즉석에서 허락했으며 동대문운동장의 조명시설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펠레를 비롯한 에우제비오, 베켄바우어 등 세계적인 초일류 선수들이 거의 모두 거쳐 갔던 동대문운동장. 그래서 더욱 국내축구팬의 사랑을 받게 됐던 동대문운동장이 ‘서울운동장’으로부터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다시 바뀌게 된 것은 1984년의 일이었다.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토록 유치결정이 내려진 뒤 정부에서는 잠실에 있는 경기장을 주경기장으로 사용키로 했다. 그렇게 될 경우, 서울운동장을 그대로 ‘서울운동장’이라고 부르게 되면 ‘잠실주경기장’이 보조용 경기장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됐던 것이다.

2002년 제17회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축구경기장은 부족함이 없을 만큼 많이 생겼다. 그러나 ‘동대문운동장’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1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에 걸쳐 한국축구를 키워주고 이끌어 주었던 바로 그곳이 동대문운동장이었던 만큼 이미 고인이 된 옛 축구인에서부터 오늘의 젊은 축구인들까지, 그리고 너무도 많은 모든 국내축구팬들은 절대로 ‘동대문운동장’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서울시 당국의 방침에 의해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된다 하더라도 그곳이 한국축구의 발원지요 중심축이었다는 상징물 하나만은 남겨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플라마ㅣ이의재 고문 / 사진=구윤경] - 前 KBS 축구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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